세계신기록보다 짜릿한 승리
장애 못 건너도 한강은 건넜다
발달장애 14살 소녀 예은이, 한강 건너기 '위대한 승리'
조광민(hyde2002) 기자
"불가능,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Impossible is Nothing)."
한 스포츠 업체의 유명한 광고 문구다. 오늘도 TV를 켜면 이 업체가 후원하는 세계적인 스포츠 스타들이 시청자를 향해 "내 얘기 한번 들어볼래?" 라는 물음을 던지며 저마다 감동적인 성공 스토리를 늘어놓는다.
기계체조가 하고 싶었지만 키가 너무 크는 바람에 장대높이뛰기 선수가 되었다는 여자 장대높이뛰기 세계신기록 보유자, 어릴 적 자신의 성장호르몬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피나는 노력을 통해 신체적 약점을 기술로 극복했다는 세계적인 축구선수 등이 "불가능은 아무것도 아니다"고 외치는 그들이다.
그런데 이보다 훨씬 더한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꾼 사람들이 있다. '장애'라는 피할 수도, 선택할 수도 없는 자신과의 싸움을 이겨내고 맨 몸으로 한강을 건넌 40명의 장애인이 그들이다. 비록 세계신기록을 수립한 것도 아니고 세계가 열광하는 대단한 스타도 아니지만 이들의 '작은 성공'이야말로 농도 짙은 감동을 우리에게 안겨준다.
장애인이 한강을 헤엄쳐서 건넌다고?
25일 한강 잠실지구 선착장에서 제1회 장애인 수영 한강 건너기 대회가 열렸다. 자원봉사를 자처한 대한인명구조협회 50명의 안전요원과 함께 40명의 장애인과 10명의 일반인이 한강지구에서 뚝섬지구 사이의 1.6㎞ 구간을 수영으로 건너는 것을 골자로 하는 대회였다.
40명의 장애인 중에는 세계선수권대회에서도 우승한 일반인 선수 수준 이상의 수영실력을 가진 장애인 선수가 포함되어 있는 반면, 수영장을 떠나 처음 강에 나와 본 아이들도 있었다. 선수 개인마다 전담하는 안전요원이 있다고는 하나 결코 쉽지 않은 도전인 셈이었다.
장애인수영연맹 이사 김성호(50)씨는 "얼마 전까지도 출전선수들의 보험을 들 수가 없어서 대회가 무산될 뻔 했다"며 "장애인의 몸으로 한강을 건넌다는 것이 쉽지 않은 도전이지만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이 대회를 개최했다"고 이번 대회의 취지를 밝혔다.
▲ 25일 제1회 장애인 수영 한강 건너기 대회가 한강 잠실지구에서 열렸다. 이 날 장애인 40명은 1.6㎞의 한강물을 헤엄쳐 갔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한 구조대원과 구급차들이 대기하고 있다.
ⓒ 조광민
14세 수영 소녀 김예은도 이 대회에 참가한 40명의 장애인 중 한 명이다. 중증 발달장애를 앓고 있는 탓에 간단한 일상적인 대화조차 어려운 예은이지만 3년 넘게 배운 수영실력만큼은 선수 반에 소속되어 있을 정도로 수준급이었다.
하지만 예은이에게 한강은 처음이었다. 더구나 발달장애의 경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가 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한강을 건너는 중 예은이가 갑작스레 돌발적인 행동이라도 한다면 큰 일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자신감을 얻기 위해 참가한 대회에서 좌절만을 안고 돌아갈지도 모를 일이었다.
3년간 예은이를 가르쳤던 곽현정(28)씨에게 예은이의 한강 건너기가 성공할 수 있을지에 대해 물었다. 곽씨는 "평소 수영장에서의 연습량을 생각하면 1.6㎞의 수영 거리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잔잔한 수영장이 아닌 물살이 흐르는 한강이라는 새로운 환경에 예은이가 적응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라며 다소 조심스러운 전망을 내놓았다.
발달장애 14세 수영 소녀 예은이의 한강 도전기
▲ 수준급의 수영실력을 자랑하는 예은이에게도 처음 접하는 한강물은 두렵기만 했다. 그러나 곽씨의 도움으로 예은이는 앞으로 헤엄쳐 나갈 수 있었다.
ⓒ 조광민
출발 전 예은이의 긴장감을 풀어주기 위해 함께 손장난을 쳐주던 곽씨였지만 곽씨의 표정에서 예은이만큼이나 긴장된 빛이 흘렀다. 갑작스럽게 급한 일이 생겨 오늘 대회에 참가하지 못한 예은이 어머니를 대신해서 예은이의 일일 어머니 역할까지 해야 하는 곽씨로서는 무엇보다 예은이의 안전이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경기 시작 전 몸을 푸는 스트레칭이 시작됐다. "자 이제 뒤로" 팔을 뒤로 돌리라는 지도자의 주문을 잘못 이해한 예은이가 갑자기 몸을 뒤로 돌렸다. "예은아 몸을 돌리지 말고 팔을 뒤로 이렇게 해야지" 곽씨는 예은이의 몸을 앞으로 돌려세우며 예은이의 팔을 뒤로 잡아 넘겼다. '얘가 잘 해낼 수 있을까' 예은이를 보는 불안함은 점점 더해져만 갔다.
오전 11시, 대회의 막이 올랐다. 숫자가 적힌 주황색 수영모를 쓴 출전선수들이 하나 둘 출발지인 한강 선착장에서 강으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그런데 34번 수영모를 쓴 예은이가 보이지 않았다. '얘가 어디를 갔을까.' 시작 전부터 유달리 안절부절하던 예은이였기에 강에 대한 두려움에 포기라도 하지 않았는지 걱정됐다.
그런데 5분쯤 지났을 때 예은이가 전담 안전요원 박선희(20)씨와 함께 방파제를 내려왔다. 박씨는 긴장한 탓에 화장실이 급했던 예은이와 함께 화장실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평소 열심히 준비하고 훈련해왔기 때문에 안전사고 없이 무사히 한강을 건널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하는 박씨였지만 그녀 역시 발달장애를 가진 아이를 맡아 한강을 건너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드디어 예은이의 차례가 돌아왔다. 선수반의 가장 마지막으로 예은이가 한강에 몸을 담갔다. 평소 수영장 물과는 다른 한강물이 이상했는지 인상을 찡그리며 머뭇거리는 예은이에게 장애인수영연맹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김예은 뭐하니! 어서 출발해." 다소 가혹하다 싶을 정도의 다그침이었지만 예은이를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당황한 예은이가 한강으로 몸을 날렸다. 그런데 5m도 채 못가서 예은이가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아직까지는 예은이의 키보다도 얕은 수심이었지만 생전 처음 접해보는 한강물에 지레 겁을 먹은 것이다. 금방이라도 강에 빠져 버릴 것 같은 예은이를 향해 놀란 곽씨가 허겁지겁 달려갔다.
"김예은! 너 때문에 내가 못살아 정말" 곽씨가 예은이를 꽉 감싸 안으며 말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곽씨와 잠시간 얘기를 나눈 예은이가 언제 그랬냐는 듯 한강을 향해 헤엄치기 시작한 것이다. 과연 끝까지 버텨낼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기우였을 만큼 힘찬 팔놀림이었다. 또래들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예은이는 점차 시야에서 사라져가고 있었다.
'해피엔딩'으로 끝난 예은이의 한강 건너기
마지막으로 대회에 참가한 일반인 10명이 강으로 뛰어 들면서 50명의 모든 출전선수가 입수를 마쳤다. 시끌벅적했던 선착장에 고요한 적막이 흘렀다.
뚝섬지구에 도착해서 배를 타고 이 곳에 다시 돌아오려면 두 시간은 족히 걸릴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선착장을 뜰 수가 없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던 아이였지만 예은이가 강에서 사투를 벌이는 동안은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을 것만 같았다. 망원경 하나 없이 물끄러미 한강물을 쳐다보고 앉았는지 얼마가 흘렀을까. 저만치서 모터보트 하나가 굉음을 내며 이쪽을 향해 왔다.
낮12시 50분, 이곳을 출발한 지 2시간이 다 돼서야 출전 선수가 첫 번째로 돌아왔다. "골인" 나를 포함하여 20명 남짓의 결코 많지 않은 숫자였지만 선착장에 모인 모두가 박수를 쳐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잘했다" "멋지다"는 환호성이 들려왔다. 온몸에 짜릿한 전율이 흘렀다. 서울월드컵경기장에 흐르는 6만 관중의 박수소리가 이보다 우렁찰까.
▲ 무사히 한강 건너기를 마친 예은이가 선착장에 오르는 곽씨를 부축해주고 있다.
ⓒ 조광민
첫 번째 도착자의 뒤를 이어 속속들이 선수들이 도착했다. 출발 전 다소 긴장됐던 분위기는 어디서도 느낄 수 없었다. 출전선수를 싣고 한강을 가로지르는 제트스키의 행렬에서는 축제의 장을 보는 듯한 착각마저 들었다.
1시 14분 대부분의 출전선수를 실은 큰 배가 눈에 들어왔다. 배는 몇 번이나 방향을 틀어서야 선착장에 멈춰 섰다. 50명은 족히 돼 보이는 사람들 중에 예은이를 찾기 시작했다. 출전선수 모두 무사히 뚝섬지구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접한 후였지만 끝까지 마음이 놓이지를 않았다.
그 때 뱃머리 옆에서 웃음짓는 곽씨와 예은이가 보였다. 곽씨는 배에서 내리면서도 연신 예은이 칭찬에 입이 마른다. "예은이가 1등이야, 선수반에서 가장 늦게 출발했으면서 제일 먼저 도착했어" 곽씨의 말에 따르면 한강물에 자신이 붙은 예은이가 헤엄을 쳐 나가자 안전요원들이 따라붙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선착장에 오르는 곽씨를 부축해주는 예은이의 모습에서는 의엿함마저 느낄 수 있었다. 14살 소녀 예은이의 한강 도전기는 '해피엔딩'이었다.
"내 이름은 김예은, 내 얘기 한번 들어볼래?"
무사히 수영을 마친 곽씨에게 예은이와 함께 한강을 건넌 기분을 물었다. "처음에는 과연 예은이가 해낼 수 있을까 걱정을 많이 한 것도 사실"이었다는 곽씨는 "하지만 역시 하니까 되더라. 이번 계기로 예은이도 큰 자신감을 얻었을 것" 이라며 만면에 웃음을 띠고 기쁨의 소감을 밝혔다.
예은이를 향해 "기분이 어떠니?" "힘들지는 않았어?" 하고 물었다. 하지만 예은이는 이상한 듯 나를 쳐다볼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한강을 헤엄쳐 건넜다고 해서 예은이가 가진 장애까지 건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탈의실로 향하는 동안 맨발로 모래바닥을 걷는 예은이를 향해 곽씨가 슬리퍼를 벗어줬다. 그런데 신발을 받아 신고 몇 발쯤 내걷던 예은이가 곽씨를 향해 재차 슬리퍼를 내미는 것이 아닌가. 됐다면서 예은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곽씨의 뒷모습에서 왠지 모를 울컥하는 감정이 밀려왔다.
▲ 대회에 출전한 장애인과 일반인 안전요원 모두가 한데모여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이번 대회는 단 한명의 낙오자나 부상자 없이 성공적으로 막을 내렸다.
ⓒ 조광민
혹자는 장애인들이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이 힘든 대회를 열었느냐 물을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많은 보험회사에서 출전선수들의 안전문제를 우려해 보험승인을 해주지 않아 대회가 무산위기에 놓였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곽씨를 생각해주는 예은이의 모습에서 예은이가 헤엄쳐 건넌 한강에는 '한강 이상'의 의미가 있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발달장애를 앓는 14세 수영 소녀가 처음 한강을 헤엄쳐 건넌다고 했을 때 모두가 비웃었다. 왜 사서 고생을 하느냐고 의아해했다. 그러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느냐고 걱정스러워 했다. 하지만 예은이는 보란 듯이 해냈다. 처음엔 들어가기조차 두려운 한강물이었지만 또래 누구보다 빠르게 한강을 헤엄쳐 갔다. '두려움'과 '편견'의 강에 맞선 예은이의 도전은 위대한 승리로 끝을 맺었다.
불가능? 소녀에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못해서 안하는 게 아니라 안해서 못하는 것"
[인터뷰] 김성호 장애인수영연맹 이사
▲ 출전선수 전원이 무사히 도착했다는 소식을 접한 김성호씨가 밝게 웃고 있다.
ⓒ조광민
모든 선수가 한강물로 뛰어든 다음에도 장애인 수영연맹 이사 김성호(50)씨는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처음 시도하는 장애인 수영 한강 건너기 대회여서인지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망원경을 끼고 먼발치를 바라보는 김씨의 표정에서 물가에 자식을 내 놓은 부모의 심정이 느껴졌다.
"전원 무사히 뚝섬지구에 도착했답니다." 도착지에 미리 도착해 있던 관계자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제야 김씨의 얼굴에는 웃음이 돌았다. 감격에 겨워하는 김씨에게 제1회 장애인 수영 한강 건너기 대회의 이모저모에 대해 물었다.
-장애인 한강 수영 건너기 대회를 개최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
"무엇보다 장애인 스스로가 '우리도 할 수 있다'는 마음을 갖게 해주고 싶었다. 장애인을 이상한 듯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도 문제지만 장애인 스스로 자신의 능력에 한계를 씌우는 것도 큰 문제다. 작은 규모지만 우리를 보고 많은 장애인들이 희망과 자신감을 갖기를 원했다."
-대회를 개최하는데 어려운 점은 무엇이었나?
"한강에서 대회를 개최하려면 출전선수 전원이 보험에 가입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보험사들은 장애인이 한강을 건넌다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보험승인이 나지 않자 계획된 대회가 무산될 위기에 놓였다. 다행히 외국계 보험회사를 통해 문제가 해결돼서 대회를 개최할 수 있었다. 재정적으로 힘든 점도 많았다. 장애인에 책정된 예산을 끌어 쓰려고 노력해봤지만 '예산이 부족하다' '도와주고 싶지만 여건상 힘들다'는 답변들만 들었다. 이번 대회를 도와주신 분들의 후원이 없었다면 이마저도 열기 힘들었을 것이다."
-대회를 준비하며 우려의 목소리가 많았을 것 같다. 장애인으로서 한강을 헤엄쳐 건너는 것이 위험하지는 않은가?
"이 대회는 장애인수영협회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1.6km 이상을 쉬지 않고 수영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는 선수들에 한해 출전을 허락했다. 이중에 10명 정도는 일반인 이상의 수영실력을 자랑하는 장애인 수영 국가대표 선수기도 하다. 또한 일반인을 포함한 출전 선수 50명의 숫자만큼 대한인명구조협회의 자원봉사자 안전요원 50명이 1:1로 선수를 전담해서 맡았다. 다만 한강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경험해 보지 못한 장애자들이 얼마나 잘 적응해서 전원 완영할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는데 무사히 대회를 마칠 수 있게 되어 정말 다행이다."
-이번 대회를 통해 얻은 가장 큰 소득이 있다면 무엇인가?
"말했듯이 장애인 스스로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또한 일반인들이 한강을 헤엄쳐 건너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장애인을 다시 보는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거리에 나가 장애인 인권에 대해 백번 말로 떠들어봐야 들을 때만 잠깐이고 아무런 변화가 없다. 상징적으로나마 이렇게 직접 행동으로 보여줘야 장애인의 능력에 대한 사회적 인식도 달라진다."
-앞으로의 차기 장애인 수영 한강 건너기 대회에 바라는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
"이번 대회를 준비하며 가장 아쉬웠던 점이 대회의 주인공인 장애인의 참여가 저조했던 것이다. 대회의 취지에 대해 아무리 설명을 해도 '무슨 장애인이 한강을 건너' 라고 스스로 체념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대회를 계기로 대회출전을 마다했던 장애인들도 큰 용기를 얻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내년 대회에는 올해보다 많은 장애인이 대회에 참가해서 그야말로 모두와 함께하는 축제의 장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조광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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