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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32 내 인생의 폭탄주

이즘(ism) 2007. 12. 13. 14:10
내 인생의 폭탄주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한겨레 고나무 기자
» 비판의 목소리도 높지만, 폭탄주는 우리 일상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사진 박미향 기자
비판의 목소리도 높지만, 폭탄주는 우리 일상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사람들은 폭탄주를 마시면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한다. 각계의 ‘주당’들로부터 폭탄주에 얽힌 흥미진진한 에피소드를 들어봤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술은 즐기면서 마시는 것”이라고 말했다.

제조는 안 한다, 혼자만 즐긴다

돌발적 폭탄에 신음하다가 음주인생에 사형선고는 받지 말아야지

» 박상우 소설가
폭탄주에는 폭탄이 없다. 누군가 술에다 보이지 않는 폭약과 뇌관을 설치하는 기막힌 발명을 한 게 아니라면 폭탄주라는 이름은 분명 적절한 게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는 분명 폭탄주가 존재한다. 실제로 폭탄이 설치되어 있지 않지만 그것에 내장된 두 가지 은유적 폭탄이 무엇인지를 술꾼들은 잘 알고 있다. 하나는 “내일은 없다!”, 다른 하나는 “마시고 죽자!”

술자리가 지닌 매력의 하나는 현실적인 이성과 경계의식의 해체다. 긴장이 풀어지고 마음이 편안해질 뿐만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호기로워지고 주변 사람들과의 의사소통도 놀라울 정도로 원활해진다. 그러다 보니 어느 경지에 이르면 “에라, 모르겠다. 마시고 죽자!” 하는 폭탄선언도 아무렇지 않게 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이 그만큼 각박해지고 사람들이 과도한 긴장과 스트레스에 시달린다는 방증일 터이다.

폭탄주가 특히 조직문화 속에서 활성화되고 있음은 그것을 웅변으로 입증한다. 정치인·군인·검사들의 술자리에서 폭탄주로 사고가 심심찮게 터져 나오는 것도 그런 배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조직의 연대감이나 동질감을 과시하고자 했던 폭탄주가 몇 순배 돌고 난 뒤에는 현실 망각 욕구와 자폭 욕구가 발현해 테러 수준의 사고도 얼마든지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폭탄주를 제조하는 사람이 병권을 쥔다는 점에서 폭탄주가 돌고 도는 과정은 일사불란한 군사작전을 방불케 한다. 나도 한때 소설가 이순원이 문인들의 술자리에서 병권을 장악하고 ‘좌익척결 우익보강’이나 ‘우익척결 좌익보강’을 내세우며 왼쪽으로 돌리고 오른쪽으로 돌리는 폭탄주를 심심찮게 받아 마신 적이 있다. 하지만 술이 돌아가는 과정은 재미있을지 몰라도 폭탄주 술자리에는 반드시 끝이 있기 마련이다. 다른 술자리와 달리 ‘좋은 끝’이 거둬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어떻게 귀가했는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돌아갔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이제는 주력이 30년을 넘었다. 하지만 나는 폭탄주를 즐기지 않는다. 진정 술을 즐기고 싶기 때문에 돌발적인 폭탄을 맞고 싶지 않고, 폭탄의 여파로 기억상실증 환자가 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폭탄주라는 이름, 그 자학적이거나 가학적인 용어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로열 살루트 21년산을 맥주에 섞어 폭탄주를 만드는 얼빠진 인사를 본 적도 있지만, 술자리가 마치 군사정권 시절로 회귀하는 것 같은 분위기는 더더욱 싫다.

그럼에도 나는 요즘도 술자리에서 술을 섞어 마신다. 하지만 섞어 마실 뿐이지 병권을 장악하고 별도의 폭탄을 제조하거나 제조한 폭탄을 돌리는 일 같은 건 절대 하지 않는다. 소주와 맥주 두 가지를 다 받아놓고 앉아 맥주잔에다 적당히 소주를 섞어 야금야금 마시는 것이다. 내 주력쯤 되면 맥주는 너무 싱겁고 소주는 너무 쓰기 때문에 그와 같은 퓨전주법이 오히려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정말로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술을 함부로 마시지 않는다. 조지훈 선생의 주도 18단을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술을 마시는 일에는 나름 단계가 있는 법이다. 그것을 스스로 알고 절제하고 조절할 줄 아는 사람만이 오래 술을 즐기고 또한 음미할 수 있을 것이다. 주변에서 술로 목숨을 잃거나 간이 상하거나 알코올 중독에 빠져 힘겨운 나날을 보내는 사람들을 자주 보면서 술을 절제할 필요를 새삼 절감하게 된다.

술이란 그것을 마신 사람으로 하여금 정확하게 대가를 치르게 한다. 마신 양만큼 심신의 고통을 겪어야 하고, 잘못 마시면 안 마신 것만 못한 결과를 불러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술은 ‘잘’ 마셔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젊은날 마신 술 때문에 나이 들어 술 한 잔 입에 대지 못하는 신세가 된다는 것은 애주가에게 사형선고와 다를 바 없다. 그것을 위해 나는 술잔을 기울일 때마다 대비하는 마음을 놓지 않는다. 술을 마신 다음날은 마신 만큼 운동으로 땀을 흘리고 다시 육체를 빈 잔으로 만들어 놓는다. 그런 대가에 충실하지 않으면 알코올성 지방이 간에 축적되어 음주 수명이 그만큼 짧아지기 때문이다. 폭탄주를 마실 수 있는 호기가 있다면 오래 마시고 즐겁게 마시기 위한 자기방어에도 그만큼 적극적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잘 마시고 오래 마시는 일, 그것이 진정한 애주가의 도가 아니겠는가.

박상우 소설가

경호원들이 들이닥쳐 폭탄제거?

우크라이나 대통령 부인의 오찬 초대 행사에서 벌어진 일

» 예종석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
나는 폭탄주 예찬론자이다. 폭탄주를 군사문화의 잔재라거나 좋은 술의 미묘한 맛을 모르는 무지의 소산이라고 깎아내리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분위기를 살리는 데는 그만한 것이 없고 즐겁자고 마시는 술에 필요 이상의 이미를 덧붙여서 고민할 만큼 고매한 성품도 아니어서 나는 폭탄주를 즐겨 마신다.

오래전 절친한 선배의 상가에서 벌어진 일이다. 밤늦게 상주와 함께 빈소를 지키고 있다가 분위기가 너무 침통하고 가라앉았기에 맥주와 소주를 섞은 이른바 ‘소폭’을 한 잔씩 돌렸다. 그제야 입을 닫고 있던 문상객들이 말문을 열기 시작했고 우리는 그날 밤 고인을 추모하며 정겹게 밤을 지새웠다. 그날 이후 얻게 된 애칭이 ‘예폭’이다. 예 교수가 폭탄주 잘 만든다고 지인들이 붙여준 것이다. 그렇게 얻은 별명이 인터넷 세상이 되면서 내 아이디가 되었고 지금은 ‘예폭’(禮瀑)이라는 점잖은(?) 아호로도 쓰이게 되었다. 요즈음 온라인 동호회의 젊은 친구들은 나를 ‘예폭님’이라 부르고 주위 사람들도 예 교수보다는 ‘예폭’이라는 별칭을 더 즐겨 부른다.

몇 년 전에 우크라이나의 독립기념일에 초청받아 간 일이 있다. 경축행사가 끝나고 일행들과 함께 그곳 대통령 부인의 오찬 초대를 받았다. 관저가 아닌 시내의 안가 같은 곳에서 식사를 했는데 음식도 훌륭하고 장소도 좋았지만, 분위기는 그런 자리가 흔히 그렇듯 딱딱하고 형식적이었다. 식사가 끝난 후 양측 인사들이 돌아가며 덕담을 한마디씩 하고 건배를 제의하는 순서가 되었다. 우크라이나 측 인사들의 술 실력은 대단했다. 그 독한 보드카를 물 마시듯 들이켜도 끄떡없었다. 내 순서가 돌아왔을 때 장난기가 발동한 나는 간단한 설명과 함께 폭탄주를 제안했고 그때부터 좌중에는 우호적인 분위기가 넘쳐나기 시작했다. 취흥이 도도해지면서 주연은 길어졌고 점심으로 시작한 자리는 어느새 저녁 무렵에 이르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경호원들이 들이닥쳤다. 대통령 부부가 독립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방문한 푸틴 러시아 대통령 부부와 만찬 일정이 잡혀 있는데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다는 것이었다. 경호원들에 에워싸인 대통령 부인은 순식간에 그 자리를 떠났고 어리둥절해진 우리는 취기를 주체하지 못하며 한동안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날의 폭탄주가 한국과 우크라이나 사이 친선에 얼마나 기여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대통령 부인은 다음날 떠나는 우리에게 초대형 보드카 한 병씩을 선물로 보내주었다.

예종석 한양대 경영학부 교수

헉, 30년산 위스키를 섞다니…

스코틀랜드 마스터 블랜더들을 당혹케 했던 300㎖ 폭탄의 기억

» 김상수 (주) 바움커뮤니케이션즈 대표
각종 송년모임으로 몸살을 앓는 12월이 찾아왔다. 떼려야 뗄 수 없는 음주 문화에 잘 길들여진 필자로서는 12월이라 하여 특별할 것도 없지만 세월의 힘 앞에선 천하장사도 무력한 것 아니겠는가! 많은 이들과 만나야 하는 직업 특성상 음주는 절대 빼놓을 수 없는 필요악이다. 여러 사람을 혼자 상대하다 보니 상대방이 한 잔 마실 때 서너 잔 마시는 것은 기본, 점점 불어나는 체중과 함께 건강에 이상 징후를 보이게 되자 잔을 줄일 묘안을 떠올렸다.

필자의 묘안은 우리 시대 술문화로 정착한 일명 ‘폭탄주’다. 이는 차례로 돌아가며 공평하게 마시는 묘미가 있어 오히려 좋았다. 물론 폭탄주 문화가 술이 약한 이들에겐 치명적일 수 있으나 주당들에겐 그지없이 반가운 문화다. 쉽게 취함으로써 진솔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십여 년 전 스코틀랜드를 방문했다. 그곳 성에서 스코틀랜드 전통의상인 ‘킬트’를 입고 세계적인 마스터 블랜더와 함께 폭탄주를 마셨던 기억이 새롭다. 당시 나는 한 주류업체 중역이었다. 30년 숙성 위스키를 만드는 장인들이 내 옆에 즐비했다. 오래 숙성된 위스키의 맛을 음미하며 모두들 조금씩 취해 갔다. 그때였다. 우리 일행 중 한 사람이 필자를 “폭탄주 제조 면허가 있는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바람에 갑자기 분위기는 ‘한국식’으로 반전됐다.

스코틀랜드 장인들은 잠깐 눈치를 보다 “맛보고 싶다”고 말했다. 지금 생각하면 예의상 했던 말이었던 것 같지만, 이 말은 식탁에 불을 질렀다. 한국처럼 200㎖가 아닌 300㎖가 넘는 스코틀랜드의 전통 맥주잔이 잔뜩 실려 왔고, 나는 위스키 30년산을 가지고 50여명에게 폭탄주 세례를 선물했다. 한잔씩 들이킨 그들은 입으로는 “원더풀”을 외쳤지만, 표정은 씁쓸했다. ‘그 좋은 30년산 위스키를 섞어마시다니’란 뜻으로 읽혔다. 심지어 한 백인 여성 직원은 폭탄주잔을 피해 도망을 쳤다. 지금도 폭탄주를 들이킨 그들의 굳은 표정을 떠올릴 때면 미안한 마음과 함께 웃음이 나온다. 그러나 다행히 모임은 흥겹게 끝났다.

대통령 선거로 세상이 온통 떠들썩하다. 선거 결과가 나오면 승자와 패자가 함께 폭탄주 한 잔을 기울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음력으로는 아직 많이 남았지만 2008년 무자(戊子)년에는 국민 모두 행복한 한 해가 되길 바라며, 원샷!

김상수 (주) 바움커뮤니케이션즈 대표

취해도 취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폭탄으로 말미암아 ‘자백치기’ 운전기사에 당한 기자의 고백

» 고나무 기자
가수 리쌍식으로 말하자면, 사회부 법조팀에 있던 2년 동안 ‘취해도 취한 게 아니어야 함’을 배웠다. 2005년 9월부터 올해 8월까지 근무했던 법조팀에서 술자리는 대부분 취재를 위한 ‘싸움터’였다. 한국에서 폭탄주를 처음 마신 집단은 검사로 알려졌는데,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검사들은 폭탄주를 세게 마셨다. 덩달아 판사와 변호사들도 술고래가 많았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두세 차례꼴로 폭음을 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2005년 12월 중순 저녁이었다. 판결을 취재하면서 알게 된 판사 서너 사람과 송년회를 빙자해 술을 펐다. 법조팀에서 굴러먹은 지 석 달째. 거의 매일 송년회가 이어졌다. 퐁! 퐁! 양주 스트레이트잔이 맥주잔에 빠지는 경쾌한 소리. 2차로 자리를 옮겼다. 역시나 쌍끌이 폭탄주와 러브샷이 이어졌다.

‘이러다가 집에 못 가겠구나’란 생각이 정확히 언제 들었는지, 또 정확히 술자리를 도망 나와 택시를 잡아탔는지 기억이 없었다. 택시를 타자마자 까무룩 정신을 잃은 나는 “○○대학 후문에 다 왔다”는 택시기사의 퉁명스런 목소리에 잠에서 깼다. 겨우 정신이 든 나는 택시비를 내려고 지갑을 열었다. 아뿔사. 분명 1만원권 지폐가 있어야 할 지갑이 비어 있었다. 꼬부라진 혀로 사정을 설명했다. 택시기사는 혀를 끌끌 차며 그냥 내리라 했다. 나는 연신 허리를 구부리며 용서를 빌었다.

택시기사가 아량을 베푼 게 아님을 다음날 알게 됐다. 점심 때 현금인출기에서 돈을 찾으려는데 잔액 부족이었다. 일주일 전이 월급날이었는데 웬 잔액 부족? 두세 번 카드를 긁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 당장 근처 은행에 찾아가 통장정리를 해 봤다. 그날 새벽 2시에 ‘누군가’ 남은 현금 50여만원을 몽땅 인출했다.

귀신은 아니었다. 넉 달 뒤 서울종로경찰서는 택시기사 권아무개(48)씨를 구속했다. 공소장에 적힌 권씨의 혐의를 보는 순간 뒤통수를 망치로 맞는 느낌이 들었다. 권씨는 만취한 손님에게 “택시비를 뽑아주겠다”고 꼬드겼다. 헤롱헤롱한 상태에서 손님은 현금카드를 건넸다는 것이다. 권씨의 감언이설에 손님들은 죄다 비밀번호를 ‘자백’했다. 권씨는 이런 수법으로 2004년 9월부터 지난해 4월까지 192차례 모두 3880만원을 가로챘다. 또 훔친 신용카드로 187회에 걸쳐 3740만원어치의 신용구매도 했다.

공소장에 적힌 범행 장소가 대부분 강남인 것으로 보아 나를 엿 먹인 택시기사는 권씨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증거가 없어 나와 관련된 범죄는 권씨의 혐의에 추가되지 않았다.

나는 권씨의 수법을 ‘자백치기’라 스스로 명명하고 ‘체험기’를 인터넷판 기사로 썼다. 수십만원짜리 취재비를 들인 기사인 셈. 그 사건 뒤 법조기자는 취해도 취하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그 사건 뒤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웃고 다녔지만, 그것 역시 웃어도 웃는 게 아니었다.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