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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강주막 경상북도 민속자료 304호. 지난 해 12월 복원되었다. |
ⓒ 장호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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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삼강(三江)으로 길을 떠난다. 낙동강과 내성천, 금천의 세 강줄기가 몸을 섞는 나루. 경북 예천군 풍양면 삼강리로 간다. 거기 이백 살도 넘은 회화나무 그늘, 낙동강 천삼백 리 물길에 마지막 남은 주막. 일흔 해 가까이 뱃사람과 장사치들 등 나그네들을 거두었던 어느 술어미의 한이 서린 곳, 삼강 주막으로 간다.
삼강은 낙동강 하구 김해에서 올라오는 소금배가 하회마을까지 가는 길목, 내륙의 미곡과 소금을 교환하던 상인과 보부상들로 들끓던 곳이었다. 한 세기 전에 이 주막이 들어섰을 때, 삼강나루는 짚신 신긴 소를 서울로 몰고 가던 소몰이꾼으로 북적였다. 소 여섯 마리를 실을 수 있었다는 큰 나룻배는 바로 삼강의 번성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수운(水運)의 쇠퇴와 함께 추억으로만 남은 옛 주막엔 소몰이꾼과 보부상 대신 각지에서 찾아든 길손들로 붐빈다. 꽃다운 열아홉 새색시 적부터 70여 년 동안 이곳을 지켰던 주모가 세상을 떠난 뒤 이 주막이 경상북도 민속자료로 지정되고 복원된 까닭이다.
경상북도와 예천군이 1억5천만원을 들여 방 2개와 툇마루, 원두막 2채를 갖춘 옛 토담 초가 주막을 복원한 것은 지난해 12월이다. 낡고 헌 속살을 드러내고 있던 흙벽은 말끔하게 보수되었고 문살이 거의 남지 않은 채 돌쩌귀에 간신히 걸려 있던 방문도 튼실한 새것으로 바뀌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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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강주막 복원 전(위, 2007년 10월)과 복원 후 모습(아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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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막 저편 강둑 쪽에 몇 걸음 간격으로 새로 세워진 원두막 두 채와 함께 보수된 주막집은 마치 맞지 않는 새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해 보인다. 이백 년 회화나무 그늘에 없는 것처럼 녹아 있던 낡고 허술한 슬레이트 지붕의 옛 주막은 거기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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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막 풍경 방안(위), 부엌의 외상 눈금(가운데), 술상차림(아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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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여전히 이 옛 주막집으로 오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끊이지 않는다. 삼강마을 주민 가운데 뽑힌 새 주모 권태순(70) 씨가 그들을 위해 주막을 다시 열었다.
주모가 직접 담근 진한 농주와 손수 만든 묵과 두부, 배추전 등이 나그네를 반긴다. 농주와 묵, 두부, 배추전으로 짠 상차림이 1만2천원이다.
반자 없이 서까래를 드러낸 낮은 천장 아래 방은 좁다. 네모난 낮은 상을 마주하고 서너 사람이 앉으면 방이 꽉 찬다. 앞문 맞은편은 다락문이다. 옆에는 어울리지 않는 엔틱 형의 벽시계가, 그 아래엔 어느 주객이 남긴 낙서가 마치 편액처럼 걸렸다. 서까래에 걸린 백열등이 이 집의 역사만큼이나 허전하고 쓸쓸하다.
함께 온 옛 친구와 함께 마주 앉아 술을 마신다. 내 어릴 적 순경이나 도가(양조장) 사람의 눈을 피해 안방 아랫목의 위장한 우리 집 술독에서 익었던 그 술맛 그대로다. 두부도 묵도 시장에서 파는 물건과는 비길 수 없다. 담백하고 덜큼하지 않다.
배추전은 더 볼 것 없이 이 지역의 음식이다. 충청도에서 시집 온 집안 아주머니가 배추전을 부치면서 경상도에선 별 전을 다 먹는다고 흉을 보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맛이 있을 것 같지 않은 볼품없는 이 부침개가 경상도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제사상에까지 오르게 된 건 이유 있다.
배추전은 배추의 담백한 맛이 그대로 느껴지는 채소전이다. 고소한 튀김옷 속으로 숨이 죽은 배추의 섬유질이 그대로 느껴진다. 게다가 다른 전에 비해 기름이 덜 스며들어 느끼하지 않고 담백한 맛을 이 지방 사람들의 미각이 놓치지 않은 것이다.
농주 몇 잔에 주기가 오른다. 방을 나와 주막집을 한 바퀴 빙 돈다. 나란한 또 다른 방 앞 섬돌에 신발 몇 켤레가 얹혀 있다. 방문 문고리에 큼지막한 자물쇠가 달린 것은 이 주막집이 관리되고 있는 확실한 증거다. 방문 왼쪽에 늘어져 있는 백열등도 이 오래된 풍경을 돕는 마땅한 소품이다.
하늘은 쨍하고 금이 갈 만큼 맑고 시린 푸른빛이다. 푸근한 초가지붕의 양감 위에 유연하게 뻗은 회화나무의 마른 가지가 그 하늘을 정교하게 가르고 있다. 하늘 까마득히 뻗은 가지 끝에 까치집이 하나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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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 주모 새 주모로 뽑힌 권태순(70) 씨. 집에서 고두밥을 말리고 있다. 고두밥에 섞는 것은 솔잎이다. 삼강주막에서는 농주는 물론 묵과 두부도 손수 지어서 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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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술상을 받은 방 뒤편이 부엌이다. 좁고 낮은 그 정짓간에 주모는 보이지 않고 며느리가 분주하게 전을 부치며 술상을 차리고 있다. 줄을 잇는 손님들 때문에 주모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모양이다. 피어오르는 김 속에서 짓는 부인의 미소가 건강했다.
지붕의 무게에 짓눌려 휜 듯한 맨 서까래의 천장 너머 저편 벽에 글을 몰랐던 옛 주모가 외상값을 표시해 둔 눈금이 새겨진 벽이 남아 있다. 그을음 낀 벽에 남은 그 길쭉한 눈금은 이 주막에서 5남매를 길러냈던 유옥연 할머니의 고단한 삶의 흔적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드센 뱃사람과 장사꾼들을 거두어가며 여민 그이의 간난의 생애 한복판으로 밤새 뒤채며 삼강이 흘렀으리라. 정짓간 바람벽에도 새길 수 없었던 '술어미'의 한과 슬픔은 강둑을 따라 회화나무를 휘돌아 흘러간 강바람에 실려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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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강과 삼강교 수운의 쇠퇴는 이 나루터를 없애고 철근콘크리트 다리를 놓게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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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막 풍경 입소문을 타고 주막 소식은 곳곳으로 퍼졌다. 평일인데도 여러 고장에서 나그네들이 모여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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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나무 너머 제방에 오르니 비낀 햇살 아래 강물이 반짝였다. 갈수기라 수량이 준 강물 이편으로 갈대밭에 작은 배 하나가 버려져 있다. 강을 가로질러 예천군 풍양면과 문경시 영순면을 잇는 삼강교가 크고 날렵한 몸뚱이를 뉘고 있었다.
새로 복원한 옛 주막에는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길손의 발길이 이어진다. 작은 방 둘로는 모자라 마당 한쪽에 세운 비닐하우스 안에도 손들이 들고난다. 주차장 노릇을 하는 마당과 도로 양옆에 잇달아 대인 차들도 여러 곳에서 왔다. 경상북도와 예천군은 앞으로 9억 원을 들여 주막 주변에 옛 뱃사공·보부상 숙소를 복원할 방침이라니 이 주변은 내내 나그네로 붐빌 전망이다.
승용차와 트럭, 혹은 관광버스를 타고 와 이 ‘전근대의 풍경’에 머물면서 사람들은 저 ‘낡은 시절’의 향수에 젖는 걸까. 시종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주막을 어슬렁거리던 중년의 양복쟁이 사내는 강 건너 영순이 고향이지만 여기만 오면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고향에는 없는 게 여기에는 있지요. 고향엔 이제 남은 게 뭐 있어야지요…….”
건너편 방에서 음식을 들던 손들은 지상파 방송의 소개로 대구에서 왔다고 했다. 크게 볼 게 있는 건 아닌데 오니 잘 왔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하면서 그들은 자신들의 선택에 만족해하는 듯했다. 인근 촌로들의 발길도 만만찮다. 막걸리를 마시며 옛 시절을 추억하는 것도 노인들에겐 생광스런 일일 터였다.
지난해 10월, 삼강주막을 다녀가면서 나는 그렇게 썼다. 한갓지게 사람들은 이 주막을 찾아오겠지만 그들이 만나는 것은 다만 한 시대의 모사(模寫)와 재현일 뿐, 그 시절 사람들의 땀내와 피울음으로 얼룩진 한 시대의 고단한 삶은 아니리라고.
그래도 사람들은 온다. 곳곳에 복원되는 과거의 흔적에 사람들이 꾀는 것은 그 예스러움에 그들이 스스럼없이 젖어들고 싶어하는 까닭이다. 사람들은 이 디지털 시대의 신기루에 몸을 맡기고 살지만 자신들이 겪은 아날로그 시절을 못내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걸 무엇이라 이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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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강에 오는 봄 주막 인근의 삼강강당(경북 문화재자료 204호) 담장에 핀 목련의 꽃눈. 시나브로 봄이 오고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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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오래된 그리움이란 진실로, ‘이 밀레니엄 시대에 여전히 우리의 마음이 넘지 못하는 19세기, 그 '전근대의 실루엣' 같은 것’일까. 그 존재마저도 의식하지 못하고 지냈던 사람들이 숭례문 소실에 대한 추모로 애를 끓이는 것은 바로 그 같은 상실감의 표현은 아닐까.
이 시대의 변화에 조응하지 못하는 ‘어깃장 심사’는 어쩌면 낙동강 천삼백 리나 삼강나루를 오갔던 우리 선인들이 종내 버리지 못했던 정서의 원형일지도 모른다. 몸과 거죽은 양식으로 칠갑을 하여도 배추전과 막걸리에 녹여내는 우리네 정한은 시간과 역사의 격랑 속에서도 오롯이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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