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레저]천주교 성지순례-고난과 영광의 발자취 | ||||||||||
2007 12/25 뉴스메이커 755호 | ||||||||||
성탄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땅에 복음이 전파된 길은 그 첫걸음부터 순교와 수난의 험난한 발자취로 이어졌다. 200여 년 전 이 땅에 처음 교회가 세워진 후 무려 1만여 명이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며 죽어갔다. 그중 절반은 자신의 이름조차 남기지 않은 무명의 순교자들이다. 예수가 그랬던 것처럼 그들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위해 기꺼이 십자가의 길을 갔다. 그것은 바로 진리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구현하는 길이기도 했다. 이 땅의 천주교 사적지들에는 어느 곳이나 진한 감동의 눈물이 배어 있다. 그 눈물로 죄를 씻고 용서를 구하라. 그리고 사랑하라. 횡성 풍수원성지 한국인 신부가 지은 최초의 성당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용인을 근거로 한 40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8일 동안 피난처를 찾아 헤매다 가까스로 정착한 곳이 지금의 풍수원이었고, 그때부터 풍수원 일대는 신앙공동체 생활의 터전이 되었다. 그 후 1866년 병인박해 때와 1871년 신미양요 때 관헌들을 피해 온 신자들이 합류하면서 풍수원은 본격적인 신앙촌으로 자리 잡았다. 일부는 화전으로, 일부는 토기점으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20여 년간 숨어 지내던 주민들은 1886년 한-불조약으로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될 때까지, 처음 풍수원을 찾아들었던 때까지 치자면 무려 80여 년 동안 목자 없이 오로지 평신도들로만 신앙공동체를 유지해왔다. 신앙의 자유를 확보한 그 이듬해부터 신도들은 목자가 없는 양 떼들을 위해 신부가 상주해 돌보아주기를 강력히 열망하게 되었고, 그에 대한 응답으로 1888년 당시 조선교구에서는 풍수원 본당을 창립하고 초대 신부로 프랑스 출신 르 메르를 임명했다. 르 메르 신부는 이로써 춘천, 화천, 양구, 홍천, 원주, 양평 등 12개 군을 관할했고, 당시 신자 수는 2000여 명에 이르렀다. 그때까지만 해도 서양식 성당 건물을 알지 못했던 이들은 초가집 20여 칸을 성당으로 사용했다. 그러다가 1896년 제2대 주임으로 부임한 정규하 신부가 주도하여 1905년 현재의 성당을 착공했고, 1907년 준공에 이어 1909년 낙성식을 거행했다. 한국인 신부가 지은 첫 번째 성당이자 이 땅에 들어선 네 번째 성당인 풍수원 성당은 1982년 강원도 지방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되었다. 풍수원 성당은 신도들이 직접 벽돌을 굽고 재목으로 쓸 아름드리나무를 구해오는 등 자체의 힘으로 지었는데, 그들이 보여준 열성은 가히 후대 신도들이 본받을 만한 것이었다. 총 건립비는 6000원. 당시 1500원이란 거금을 희사한 김말구 할아버지가 있었는데,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술만 취하면 공사장으로 올라와 “내 돈 내놓으라”고 생떼를 썼다. 보다 못한 정 신부가 “말구, 너 이리와! 네 돈 다 가져가라!”고 호통을 치면, “신부님, 다시는 안 그러겠습니다”며 꽁무니를 뺐지만 다시 술에 취하면 어김없이 공사장으로 올라왔으니, 그 허튼 실랑이를 지켜보던 신도들을 웃음으로써 공사판의 노고를 씻어낼 수 있었다고 한다. 현재 풍수원 성당에는 대강의실, 온돌방 5개, 유물전시관 등을 갖춘 피정의 집이 있어 개인이나 단체로 피정을 원하는 순례자들을 맞고 있다. 고아한 자태의 본당 건물은 가끔 드라마나 영화의 촬영장소로 쓰이고 있으며, 성당 왼쪽 언덕에는 ‘순례의 길’이 조성되어 있어 예수의 생애를 따라가며 수난과 영광의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다. 군데군데 들어선 신도들의 무덤을 스쳐 지나 십자가의 예수상에 이르는 이 길은 사색을 겸한 산책로로 더없이 좋은 길이기도 하다. 지금 풍수원 성당은 성역화 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다. 대지 257만4000㎡(78만 평)에 바이블파크 등을 조성하는 사업이 마무리되면 풍수원 성당은 한국 천주교의 대표 성지로 거듭날 것이다. 안성 미리내 성지 성 김대건 신부의 넋이 흐르는 곳 26세에 생을 마친 성 김대건의 일생은 짧디 짧았으나 그가 남긴 자취는 영혼으로 영원하다. 정든 부모형제와 생이별을 하고 낯선 이국땅에서 새로운 문명에 정진하기를 10개 성상, 그 숱한 어려움을 무릅쓰고 최초의 방인 사제가 되어 이 땅에 돌아온 그는 한국 천주교의 개벽을 알린 성인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면서도 추호의 두려움이 없었다. “나의 최후의 시각이 다가왔으니 여러분은 나의 말을 잘 들으시오. 내가 외국 사람과 교제한 것은 오직 우리 교를 위하고 우리 천주를 위함이었으며, 이제 죽는 것도 천주를 위하는 것이니 바야흐로 나를 위해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려 합니다. 여러분도 죽은 후에 영보를 얻으려거든 천주를 믿으시오.” 마침내 희광이의 칼을 대하고서도 그는 태연하게 “이 모양으로 있으면 칼로 치기 쉽겠느냐?”고 묻고 “자, 준비가 되었으니 쳐라!” 하고 말했다. 국사범으로 처형당한 죄수는 통상 사흘 뒤에 그 주검을 연고자가 찾아가는 것이 관례였으나, 그의 경우 장례마저 가로막아 참수된 자리에 묻고 파수를 두어 지켰다. 하지만 죽음을 피해 살아남은 신도들은 그를 그대로 둘 수 없었으니, 그중 이민식은 파수의 눈을 피해 치명한 지 40일이 지나 김 신부의 주검을 빼내는 데 성공했다. 그는 시신을 등에 지고 험한 산길을 틈타 150리 되는 길을 밤에만 걸어 일주일 만에 자신의 고향인 미리내에 도착했다. 자신의 선산에 김 신부의 묘를 모시고 아침저녁으로 보살피던 그는 그로부터 7년 후 페레올 주교가 선종함에 따라 유언대로 김 신부의 곁에 안장했다. 그 무렵 김 신부의 어머니인 고(高) 우르술라마저 비극적인 처지에서 숨을 거둔다. 7년 사이로 남편과 아들을 여의고 이 집 저 집 문전걸식하다시피 한 눈물겨운 생애였다. 이민식은 그녀도 아들 곁에 모셔 생전에 함께 있지 못한 한을 위로했다. 그리고 자신 역시 92세까지 장수의 생을 마감한 후 그 곁에 묻혔다. 미리내는 1883년 공소가 설치되었는데 3년 뒤인 1886년 본당으로 승격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성역화 작업은 1972년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성모성심수도회와 천주성삼성직수도회가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것을 비롯해 김대건 신부 동상, 피정의 집 등이 들어섰다. 1980년에는 김 신부의 묘소가 있는 경당 옆에 9만9000㎡(3만평) 규모의 광장을 조성하고, 성당에서 경당에 이르는 길 가에 14처 조각을 설치하는 한편, 1987년부터 1989년까지 2년에 걸친 대역사 끝에 103위 성인 기념 대성전이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당진 솔뫼 성지 성 김대건 신부의 탯자리, 내포신앙의 못자리 솔뫼는 충청도에서 제일 살기 좋은 땅 내포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 1784년 한국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부터 이존창이 복음을 전파한 충청도의 천주교 신앙은 일찍이 내포지역에서 부흥을 이뤄 충청도 전 지역으로, 더 나아가 전라도 북부나 경기도 또는 경상도 북부까지 확산되었다. 내포지역은 김대건 신부의 조모 이씨의 삼촌인 이존창이 천주교를 다른 곳보다 먼저 전파한 이래 그동안 숱한 신부와 수녀·수사를 배출해오면서 ‘한국 천주교의 못자리’라고 불리고 있다. 솔뫼에서 남서쪽으로 6㎞ 정도 떨어진 신리에 있는 ‘조선교구청’은 1866년 병인박해 때 제5대 조선교구장 안 다블뤼 주교가 이곳에서 순교사료를 정리하고 성서의 한글번역작업 등을 수행하다가 붙잡혀 보령군 오천면 갈매못에서 처형당한 비극적인 역사를 지니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솔뫼 성지에 들어서면 우선 왼쪽 김대건 신부의 생가터에 남아 있는 아담한 돌우물과 함께 청신한 솔밭과 대밭이 찾는 이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게 한다. 오른쪽 피정의 집 안에 있는 성당에는 1984년 내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시성한 김대건 신부의 유해 일부가 특수 제작한 유리기구 안에 안치되어 있어 여기에 신도들이 볼을 맞추는 ‘유해친구의식(遺骸親口儀式)’이 미사 때마다 행해진다. 솔밭길을 따라 오르면 갓을 쓴 한복 차림에 왼손에 성경책을 안고 오른손을 들어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는 모습의 김대건 신부 동상이 서 있다. 그 주위로는 예수가 십자가를 메고 걸었던 고난의 길을 본뜬 ‘십자가의 길’이 조성되어 있어 김대건 신부의 고난에 찬 일생을 묵상하며 걷게 한다. 솔뫼는 이름처럼 사철 삽상한 솔바람이 이는 언덕이다. 가을의 끝에서 이 언덕의 잔디들이 누렇게 변해갈 즈음, 솔방울을 대여섯 개씩이나 매단 솔가지들이 땅에 떨어져 누우면, 마을사람들은 이것을 ‘비둘기’라 부르며 주워다 불쏘시개로 쓰곤 했다고 한다. 뒤이어 축복처럼 눈이 내려 솔밭을 덮으면, 마치 성탄 트리와도 같은 소나무 아래서 구원을 기도하기도 했을 것이다. ‘한국의 베들레헴’ 솔뫼의 겨울은 그렇게 깊어가는데, 솔뫼의 솔밭을 거닐면 어디선가 또 다른 성자의 탄생을 알리는 종소리가 은은히 들려오는 듯도 하다. 천주교 대전교구에서는 1996년 김대건 신부 순교 150주년 기념사업으로 김 신부의 생가를 복원하고 박물관 겸 경당을 건축하기로 결의했고, 생가 복원은 2005년에, 기념관은 2006년 3월에 축성했다. 1998년 충청남도는 성 김대건 신부 생가터를 지방문화재로 지정했다. 솔뫼 성지 피정의 집은 130여 명이 숙박할 수 있고, 개인·단체 피정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마련하고 있어 원하는 신자들이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다. 익산 나바위 성지 성 김대건 신부가 첫발을 디딘 곳 흰 구름들 자우룩 내리는/ 결 고운 바위산 나바위에는/ 바위 속에서도 나무들 무성합니다/ 망금정에서 바라보는 금강과 황산벌엔/ 영원한 청년의 숨결이 가득하고/ 나는 그리움으로 밀려오는/ 거룩한 상처의 향내 맡습니다/ 목숨 버려야 목숨 건지는 노래/ 하늘과 땅 맞닿는 여기 언덕에서/ 나는 바람 한 점에도 손 가벼워지기를/ 햇살 한 올에도 어깨 따뜻해지를/ 촛불 속에서 눈을 감습니다/ 내가 살아서 죽고/ 또한 죽어서 살아날 때/ 나는 비로소 작은 미소 하나로 남아/ 숨은 나뭇잎 하나 깨우는 것입니까/ 이윽고 흰 구름들이/ 설렘의 숲으로 하늘 가득 우거집니다 -김영수 ‘목숨 버려야 목숨 건지는-나바위에서’ 나바위는 금강의 선착장이었다. 1845년 10월 12일 밤, 한 청년이 배에서 내려 이곳에 발을 내딛었다. 중국에서 사제서품을 받은 한국인 최초의 신부 김대건이었다. 그는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함께 작은 배 한 척에 몸을 실어 이곳에 신부로서 첫발을 내딛은 것이다. 그때 그의 발밑으로 금강의 거친 탁류가 넘실거리며 흘렀다. 마치 닥쳐올 고난을 예고하듯. 그가 나바위에 도착하기까지 여정 또한 파란만장했다. 1836년 12월 열다섯 살의 어린 나이로 고국을 떠나 다음해 6월 마카오에 도착한 그는 1844년 12월 부제품을 받고, 이듬해 1월 천신만고 끝에 홀몸으로 의주 변문의 수구문을 통해 그리던 고국 땅을 밟았다. 하지만 3개월 뒤 다시 11명의 조선인 선원들과 함께 라파엘호라는 작은 목선을 타고 떠나 6월 4일 상하이에 도착, 8월 12일 김가항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에게 사제품을 받는다. 그리고 그 길로 함께 간 조선인 선원들과 두 외국인 신부들과 함께 귀국길에 오른 것이다. 귀국한 지 1년 만에 관헌에게 붙잡혀 순교함으로써 고국에서 그의 사목활동은 너무나도 짧은 것이었지만, 그가 남긴 족적만큼은 한국천주교사에서 가장 찬란한 자취였다. 나바위 성당은 1897년에 설립되었으나 성당 건물은 1906년에 완공되었다. 1916년에는 목조벽을 벽돌조로 바꾸고 고딕식 벽돌조의 종각을 증축했다. 한옥건물에 기와를 얹은 성당은 특이한 회랑 덕분에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맛볼 수 있어 지방문화재(사적 제318호)로 지정되었다. 올해로 110주년을 맞는 나바위 성당은 일제강점기, 6·25를 거치면서 민족과 애환을 같이했다. 1907년 계명학교를 세워 1947년 폐교될 때까지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애국계몽운동을 통한 구국에 앞장섰고, 신사참배에 저항하던 사제와 신자들이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6·25 당시에는 죽음을 무릅쓰고 성당을 지킨 사제 덕분에 단 며칠을 제외하고는 매일 미사가 봉헌된 기록도 갖고 있다. 나바위 성당은 1955년 성 김대건 신부 순교비를 세우고, 1991년에는 피정의 집을 건립했다. 300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는 대건교육관 외에도 소규모 피정자를 위한 피정의 집이 따로 마련되어 있고, 피정의 집 전반 운동장은 6600㎡(2000평) 규모로 야영장으로도 활용된다. 칠곡 한티 성지 피난처에서 처형지로, 완벽한 순교 성지
한티에 언제부터 신자들이 살기 시작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인근의 신나무골과 비슷한 때인 1815년 을해박해와 1827년 정해박해 후에 대구감옥에 갇힌 신자의 가족들이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기 위해 이곳에서 살기 시작하지 않았을까 추정하고 있다. 어쨌든 한티에는 매우 일찍부터 신자들이 자리를 잡아 대구와 영남지방 교회의 터전이 되어왔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더 확실한 것은 1837년 서울에서 낙향하여 신나무골에서 얼마간 살았던 김현상 신도 가정이 1838년과 1839년 기해박해 때 신나무골보다 더 깊은 산골인 이곳 한티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그 후 그의 가족들은 1860년 경신박해 때까지 이곳에서 살다가 대구로 나가 대구지역 첫 신자 가정 중 하나가 되었으며, 그 후손들은 초창기 대구교회를 창설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860년 경신박해로 뿔뿔이 흩어진 신자들은 박해가 뜸해지자 다시 모여들어 오히려 더 큰 규모로 성장했다. 1862년도 베르뇌 주교의 성무집행보고서에는 “칠곡의 굉장히 큰 산 중턱에 아주 외딴 마을 하나가 있는데, 이곳에는 40명가량이 성사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수차례의 박해를 간신히 넘긴 한티마을은 1866년 병인년의 대박해로 마침내 ‘최후의 날’을 맞는다. 1868년까지 3년간 유례없이 혹독했던 병인박해는 평화롭던 마을을 순식간에 피바다로 만들어버렸고, 수십 명의 신자가 한자리에서 몰살당하는 비극을 남겼다. 지금도 첩첩산중 길을 가다 보면 깨진 옹기조각, 사기조각이 발길에 채이는 한티 성지는 수십 명의 신자가 무더기로 처형된 비극의 현장으로 군데군데 그들의 묘지가 산재해 있다. 그중 이름과 그 행적이 밝혀진 이는 얼마 되지 않는다. 묘비가 서 있는 대구 날뫼 출신 서태순, 이공사가 등과 박해를 피해 신나무골로 피신했다가 다시 한티의 옹기골로 숨어든 배손의 일가족, 조가롤로와 부인 최발바라, 동생 조아기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 무명 순교자로 그 이름을 남기지 않고 있다. 한티마을 입구 송림사 앞쪽에는 대구대교구가 운영하는 성가양로원이 있는데, 순례자들은 대부분 이 앞에서 발을 멈추고 묵주의 기도를 시작하고 걸어서 한티에 이른다. 이곳에는 1983년 피정의 집이 건립되었고, 대구 시내에서 피정의 집까지는 말끔하게 포장도로가 나 있고, 팔공산 관광도로가 바로 한티를 지난다. 칠곡군 지천면 연화동에 있는 또 하나의 사적지인 신나무골에서 한티까지의 30리 산길은 도보 순례 코스로 아주 적합하다. 기획|유성문<투레 대표> toulei.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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