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자제해야지…’. 해마다 이맘때쯤 되면 쓰린 속을 어루만지며 이런 결심을 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하지만 한 해를 보내는 아쉬움과 오랜만에 만난 벗들과 어울리는 술자리 분위기에 휩싸이다 보면 출근길의 다짐은 여지없이 무너진다. 송년회 자리에서 빠질 수 없는 과음·과식이 12월을 보내는 직장인 건강에 적신호를 보내고 있다. 직격탄을 맞는 장기는 식도·위·췌장 등 소화기계. 먹고 마신 술과 음식을 소화시키고, 배출하느라 영일이 없다. 연이은 과음·과식으로 지쳐가는 ‘소화기의 비명’을 들어보자.
◆응급 지혈이 필요한 식도 출혈=과음 후 피를 토하는 ‘말로리 바이스 증후군’은 가장 심각한 과음 후유증이다. 술을 과하게 마시면 메슥거림과 구토를 하게 된다. 이때 강산인 위산이 중성인 식도로 올라오면서 식도 점막이 손상되는데 이때 혈관이 터지면서 토혈을 하게 되는 것.
점막 손상은 약하게 찢어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식도 전체가 심하게 찢어질 땐 대량 출혈로 이어지면서 생명을 위협하기도 한다. 따라서 음주 후 입에서 피가 나온다 싶을 땐 즉시 대형 병원 응급실을 찾아야 한다.
응급실에선 내시경을 통해 진단이 내려지면 찢어진 점막을 지지거나 클립으로 묶는 응급 치료를 받게 된다.
◆급성 췌장염은 금식 후 병원으로 =고교 동창 송년회에 참석한 M씨(35·남)는 다음날 아침, 명치 부위에 심한 통증과 더불어 구토가 나오기 시작했다. ‘토했으니 꿀물이 도움이 되겠지’라며 마셨는데 구토와 복통은 더한층 악화돼 병원을 찾았다. M씨가 담당의사에게 들은 진단명은 급성 췌장염. 연일 계속된 음주가 화근이었다.
급성 췌장염은 복통이 특징이다. 환자의 통증은 누우면 더 심해지는 반면 앉아서 몸을 앞으로 굽히고, 무릎을 배쪽으로 당기면 잦아든다.
가장 중요한 치료는 염증이 스스로 가라앉을 때까지 췌장이 쉴 수 있도록 ‘절대 금식(禁食)’ 하는 것. 금식하는 동안 영양은 링거수액을 정맥을 통해 공급받는다. 췌장은 20가지 이상의 소화효소를 분비하는 장기. 따라서 음식물을 섭취하는 한 소화효소 분비를 위해 활동을 게속한다. 금식 기간은 통상 3일~1주일 정도. 열 명 중 한 명은 이 방법으로도 좋아지지 않은 채 물혹·농양 등의 합병증이 생겨 장기간 치료를 받아야 한다.
◆빈발하는 위·식도 역류증= 과음은 위장과 식도 사이를 조여주는 괄약근의 힘을 느슨하게 만든다. 이렇게 되면 위장의 음식물이 식도로 거꾸로 올라온다. 정상 상태에선 괄약근이 음식이 위로 들어올 때 열렸다가 음식이 지나가는 순간 곧바로 닫힌다. 역류 현상은 위장에 음식물이 가득 찼을 때 더욱 심해진다. 증상은 속쓰림과 명치 끝 통증, 신트림, 가슴 안이 타는 듯함, 목이 쉼 등이다. 따라서 연일 과음한 뒤 이런 증상이 나타나면 내시경이나 식도 내압검사로 확진을 받아야 한다. 진단이 내려지면 술을 멀리하면서 4~8주간 약물을 복용한다.
◆빈발하는 위장·대장 질환=과음 때 가장 빈발하는 질환은 급성 위염이다. 속쓰림·더부룩함·소화불량 등 속이 불편한 증상이 나타나는데 72시간 이상의 절대 금주 기간을 지키는 게 우선이다. 또 연하고 부드러운 음식을 섭취하면서 증상을 호전시키는 대증 치료를 하면 1주일 이내에 좋아진다. 반면 연일 술을 마시게 되면 상태는 악화되기 마련이다.
기존에 위궤양·과민성 대장질환이 있는 환자는 음주 후 상태가 악화된다. 이제껏 치료를 받았다면 과음으로 상태가 원점으로 돌아가는 셈이다. 따라서 환자는 술자리에서 자신의 건강상태를 주변에 알려야 한다.
황세희 의학전문기자 ◆도움말=분당 서울대병원 소화기내과 김나영 교수, 영동세브란스병원 박효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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