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 올레길 3
■ 걷기 순서 : 원당역→권희묘→성라공원→홍도동사무소→심희수묘→서삼릉→미소마을(점심)
→배다리술박물관→원당역
■ 총 거리 : 약 13km(+1.3km : 서삼릉을 갈 경우)
■ 총 소요시간 : 약 4시간
1. 원당(元堂) 지명유래
원당은 1413년 고봉현이 고양현이 되면서 관청이 들어선 최초의 관아지터이다. 이로써 이곳을 ‘으뜸 원(元)’자와 ‘집 당(堂)’자를 써서 ‘원당리(元堂里)’ 라 부르게 되었다. 후에 이 관청은 장경왕후(중종의 왕후)의 묘를 이장한 희릉이 들어오면서 대자골로 이전했다. 또 다른 유래로는 이곳은 정승이 많이 나며, 그분들의 묘 자리로 널리 쓰이던 명당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서삼릉인데 이곳에 왕실의 큰 재실(정자각)이 있어 역시 으뜸 원자와 집 당자를 써 원당이 되었다고 한다.
2. 권희(權僖) 묘
1319(충숙왕 6)∼1405(태종 5). 고려말과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할아버지는 수문전대제학(修文殿大提學) 보(溥)이며 아버지는 검교시중 고(皐)이다. 처음에 음보(蔭補)로 벼슬길에 올라 홍주도병마사(洪州道兵馬使)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1363년(공민왕 12) 홍건적이 침입하였을 때 장단(長湍)에서 적을 물리쳐 공을 세웠다.
그뒤 문하찬성사에 이르러 영가군(永嘉君)에 봉해졌다. 조선건국 후 1393년(태조 2) 검교문하시중이 되고 원종공신녹권(原從功臣錄券)을 하사받았다.
1398년 세자전(世子殿)의 남문에서 개복신초례(開福神醮禮)를 주관하였으며, 1400년(정종 2) 판삼사사로 치사하였다.
그뒤 태종조에 검교좌정승(檢校左政丞)이 되었다. 시호는 정간(靖簡)이다.
* 아들 : 권근(權近) : 조선개국공신, 의정부찬성사(議政府贊成事, 종1품 : 뒤의 좌우 찬성)
* 손자 : 권제(權踶) : 세종 때 우찬성
* 증손자 : 권람(權擥) : 세조의 공신, 좌의정 역임
* 후손 :
- 권철(權轍) : 선조 때 영의정, 권율의 아버지
- 권율(權慄) : 임진왜란 때 도원수(총 대장)
- 권상하(權尙夏) : 송시열의 수제자. 숙종 때 좌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음.
3. 국사봉 지명유래
성라산(星邏山, 星羅山)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마치 비단과 같이 많은 별들이 하늘에 펼쳐져 있는 곳이다 하여 성라산이라 했다고 한다. 베라산은 성라산의 우리말인 별아산을 편하게 부르는 이름이다. 그리고 성라산 정상에서 1년에 한번 씩 관청에서 주관하는 큰 제사를 지냈는데 이로 인하여 붙여진 이름이 국사봉이다.
4. 일타홍(一朶紅)과 심희수(沈喜壽) 묘
일송 심희수(沈喜壽)와 부인 광주 노씨(光州盧氏)의 쌍분으로 조성된 묘 왼쪽으로 오래된 상석과 기념비가 놓여있다. 오래된 상석으로 미루어 일타홍(一朶紅)의 묘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만 하고 있다고 한다.
심희수(沈喜壽 1548∼1622)조선 중기 문신. 자는 백구(伯懼), 호는 일송(一松)·수뢰루인(水雷累人). 본관은 청송(靑松). 1570년(선조 3) 진사시에 합격, 성균관에 들어갔다. 1572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갔다. 1591년 응교·간관(諫官)이 되었으며, 1592년 임진왜란 때 의주(義州)로 선조를 호종하였다. 같은 해 도승지·형조판서를 거쳐서 호조판서가 된 뒤에 관서의 굶주리는 백성구제에 힘썼다. 그 뒤 홍문관·예문관대제학, 우의정·좌의정을 지냈다. 1615년(광해군 7)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로 있을 때 허균(許筠)과 중국 야사에 나타난 종계문제(宗系問題)로 다투다 축출되었다. 저서로 《일송집》이 있다. 상주(尙州) 봉암사(鳳巖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
<一松 沈喜壽와 기생 一朶紅의 사랑>
15세 미소년이었던 일송 심희수는 대가집 연회에 가서 선녀 같은 기생 일타홍을 보고 사모의 정을 가진다. 10여일 후 글방에서 귀가 중 말을 타고 오는 도중 일타홍을 만나 며칠을 함께 지내게 되지만 일타홍은 이런 생활은 장구한 계책이 못되니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자고 한다. 일타홍은 낭군은 도량, 재주, 품격으로 보아 일찍 과거 급제하여 영상을 지낼 관상이므로 과거급제하면 3일 안에 반드시 만날 것을 맹세한다.
심희수는 일타홍을 그리워하여 침식을 폐할 정도였으나 일타홍을 만날 생각으로 과거시험 준비에 진력하였다. 그 와중에 장가를 들었으나 금실이 좋지 못했고 결국 소년 등과하여 일타홍을 만나게 된다. 심희수는 일타홍을 집으로 데리고 왔는데 예의범절도 빈틈이 없고 여공도 정교하였다. 후일 일타홍은 미미한 병에 걸리더니 고통도 느끼지 않고 숨을 거두었는데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인생의 생사장단은 한가지이며 군자에게 은혜와 사랑을 받아 한이 없다. 낭군의 옆에 뼈가 묻혀 지하에서 다시 만나 모시는 게 소원이다’라고 하였다.
심희수는 일타홍의 시신은 손수 염하여 첩을 귀장하는 예는 없으나 다른 연고를 대어 말미를 얻고 고양의 선영 안에 장사 지냈다.
일타홍이 죽고 난 뒤부터 집에 크고 작은 길흉사가 있을 때마다 반드시 일타홍이 꿈에 나타나 예고를 했는데 하나도 틀림이 없었다. 그러던 중 꿈에 일타홍이 나타나 심희수의 명이 다했으니 맞아 뵈올 날을 기다리겠다고 말했는데 일송 심희수는 과연 다음날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달구경(賞月)- 일타홍(一朶紅)의 절명시
亭亭新月最分明 정정신월최분명
一片金光萬古情 일편금광만고정
無限世界今夜望 무한세계금야망
百年優樂幾人情 백년우락기인정
우뚝 솟은 초승달은 밝기도 하니
한 줄기 빛에 만고의 정이 실려 있네
예나 지금이나 온 누리를 밝히는데
백년의 즐거움과 슬픔을 몇 번이나 누릴까.
이별눈물(有倬) - 沈喜壽 : 일타홍을 버들상여에 싣고 가며 울며 지은 시라고 함
一朶芙蓉載柳車 일타부용재유차
香魂何處去躊躇 향혼하처거주저
錦江春雨丹旌濕 금강춘우단정습
應是佳人別淚餘 응시가인별루여
일타홍의 연꽃은 상여에 실려
향혼(香魂) 어딜 가며 주춤대나
비단강(錦江) 봄비에 붉은 명정(銘旌) 젖어드니
아마도 고운 우리 님의 이별 눈물 그 아니랴
5. 원흥동 신라 말 고려 초기 청자요
1937년 발견된 이후 우리나라 초기 청자가마터 중 대표적인 것으로 알려져 왔으며 대규모의 퇴적이 남아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1982년 정신문화연구원의 조사시에는 5개 정도의 요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현재 가마터는 전체면적이 약3.300㎡인데 비교적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4개의 구릉처럼 보이는 퇴적더미는 대량의 갑발과 소량의 폐기물로 이루어져있다.
갑발류는 일반적인 원통형과 초기의 특징적인 갑발 받침대가 있으며 자기조각은 거의무늬가 없는 청자 조각으로 짙은 암녹색이나 황갈색이 주류이다.
기형은 완(대접)류가 대부분인데 이들 중 소량의 항아리나 주전자 조각이 확인되기도 했다.
한편 장방형 벽돌도 존재하였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벽돌가마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韓國精神文化硏究院,1982,『韓國靑磁陶窯址』고양시·한국토지공사토지박물관,1999,『고양시의역사와문화유적』
6. 한규설(韓圭卨) 묘
1848(헌종 14, 서울)~1930. 한말의 무신·애국지사.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순우(舜佑), 호는 강석(江石). 아버지는 부사 승렬(承烈)이다. 형이 총융사(摠戎使) 규직(圭稷)이다. 무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1875년(고종 12) 진주병사가 되었다. 이어 전라좌수사·경상우병사·우포도대장·친군우영사(親軍右營使)·상리국총판(商理局總辦)·기기국총판(機器局總辦) 등을 거쳐 1887년 형조판서가 되었다. 그뒤 한성부판윤·친군장위사(親軍壯衛使)·총어사(摠禦使) 등을 역임했다. 1896년 법부대신 겸 고등재판소 재판장으로 있으면서 김안(金安) 등과 함께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고 있던 고종을 환궁시킬 계획을 세웠으나 실패했다. 1898년 중추원 의장이 되었으며, 독립협회가 국왕에게 의원 설치를 건의하자 이에 호응해 새로운 중추원관제를 공포하게 했다. 그해 11월 독립협회 지도자 17명이 체포되고 독립협회의 혁파가 논의되자 이들을 석방하고 민의를 존중하자고 주장 했다. 같은 달 법부대신에 임명되었으나, 이듬해 정부의 반격으로 독립협회가 강제해산될 때 해임되었다. 1901년 궁내부특진관에 임명되었고, 1902년 다시 법부대신이 되었다.
1904년 12월에는 미국에게 한국의 독립 유지를 위한 노력을 당부하는 고종의 밀서를 이승만(李承晩)·윤병구(尹炳求)에게 전달했다. 1905년 의정부참정대신(수상)이 되었다. 그해에 일본 전권대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이완용(李完用) 등을 앞세워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려 하자 일제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한규설은 ‘황제의 명령이라도 따를 수 없다’며 끝까지 이를 반대하다가 대궐 수옥헌(漱玉軒)에 감금되고 바로 면직당했다.
을사조약 체결 후 중추원고문 궁내부특진관을 지냈으며, 1907년 4월 국채보상지원금총합소 소장이 되었다. 1910년 일제가 국권을 침탈한 후 남작작위를 주었으나 거부했다. 1920년 6월 이상재(李商在) 등과 함께 조선교육회(朝鮮敎育會)를 창립하고, 이어 이를 민립대학기성회(民立大學期成會)로 발전시켜 교육을 통한 민족역량 배양으로 국권을 회복하려 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실패했다.
7. 김전(金詮)
1458(세조 4)∼1523(중종 18).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 자는 중륜(仲倫), 호는 나헌(懶軒). 지중추부사 우신(友臣)의 아들이다.
1472년(성종 3) 진사가 되었고, 1489년 식년문과에 장원, 예안현감(禮安縣監)·홍문관수찬을 역임했으며, 성종이 유신들로 하여금 피폐한 고을의 수령으로 부임하도록 하였을 때 예안현감이 되어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세우기도 하였다.
1496년(연산군 2) 신용개(申用漑)·김일손(金馹孫) 등과 함께 사가독서(賜暇讀書)한 뒤 전한(典翰)이 되었으며, 춘추관편수관을 겸하여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해에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파직당했다가 1501년 부호군(副護軍)으로 다시 서용되고, 1504년 성균관대사성에 올랐으나 갑자사화로 다시 좌천되었다.
중종반정 뒤 예조참판(禮曹參判) 겸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로 승진되었으며, 이어 이조참판·호조참판·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조광조(趙光祖) 등의 사림파가 득세한 1513년에서 1519년 사이에는 지중추부사·우참찬, 이조·형조·예조·공조의 판서, 한성부판윤·우찬성 등을 역임하면서 현량과(賢良科)의 설치 등 사림파의 개혁정치에 반대론을 전개했다.
1518년 찬집청당상(撰集廳堂上)으로 신용개·남곤(南袞) 등과 함께 《속동문선》을 왕에게 찬진하였다.
1519년 판중추부사가 되었으며, 남곤·심정(沈貞) 등과 함께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 등 사림파를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 공로로 원종공신이 되었으며, 우의정을 거쳐 1520년 영의정 겸 세자사(世子師)가 되었다.
항상 청렴결백하고 문장에도 능하였으나, 기묘사화를 일으킨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후세인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1537년 중종의 제2계비인 문정왕후(文定王后)의 폐위를 기도하다가 발각되어 유배된 뒤 사사된 당대의 권신(權臣) 김안로(金安老)는 그의 형의 아들이다.
선조의 왕비 인목대비의 아버지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은 그의 증손자이다.
8. 귀인 장씨(貴人 張氏)
고종의 후궁으로 본관은 덕수(德水)이며, 생몰년은 미상이다.
자녀로는 1남을 두었는데 고종의 5황자 의친왕이다. 궁인(宮人)으로 있다가 아들 의친왕 10세 되던 해(1886년)에 별세하였다고 전해진다. 1900년(광무 4) 9월 17일(양력) 숙원(淑媛)으로 증직되었다가 다시 1906년(광무 10)에 귀인(貴人)으로 증직되었다. 초장지는 알 수 없으나 신해(辛亥) 1911년 10월 초6일 고양군 화양 모진 2리로 이장하였다가 1965년에 도시개발로 인해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서삼릉 권역 내로 이장하였다가 다시 2009년 06월에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홍유릉 권역 내 후궁묘역으로 이장되었다.
9. 서삼릉
서삼릉은 희릉(禧陵), 효릉(孝陵), 예릉(睿陵)의 세 능을 말한다.
희릉은 조선 제 11대 왕인 중종과 계비 장경왕후의 능이다.
효릉은 조선 제 12대 왕인 인종과 비 인성왕후의 능이다.
예릉은 조선 제 25대 왕인 철종과 비 철인왕후의 능이다.
이외에도 폐비 윤씨의 묘인 회묘(懷墓), 소현세자의 묘인 소경원(紹慶園), 문효세자(정조의 아들)의 묘인 효창원(孝昌園)도 같이 있다. 이 중 효창원은 현재의 효창공원 자리에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 말기인 1945년 5월에 현 위치로 옮겨졌다.
서삼릉의 경내에는 3원과 46묘, 태실 54기가 있다. 왕릉에는 후궁, 왕자, 공주의 무덤를 만들 수 없으나, 일제시대에 멸망한 왕실의 무덤를 집중관리 한다는 이유로 왕실의 무덤을 모아놓은 것이다. 서삼릉의 영역에 후궁, 왕자, 태실을 모아놓은 것은 무덤 경내를 공동무덤로 변형시켜 왕릉으로서의 존엄과 품격을 낮추고자 한 일제의 의도적인 계획에 의한 것이다.
현재 서삼릉의 전체 면적 중 79만여 제곱미터가 농협중앙회의 종우장과 한국마사회의 종마장으로 사용되고 있어, 문화재청은 대체 부지를 마련해 시설을 점차 옮길 예정이라고 밝혔다.
10. 배다리술박물관 - 공식사이트(http://www.baedari.co.kr/) 소개글
본 박물관은 사설박물관으로서 현 주교동의 옛 이름인 ‘배다리’를 따서 박물관 이름으로 지었습니다.(연건평: 약 220 평 / 부지 : 약 1200 평 )
1915년 ‘주세령’발표당시 (1대)인근상회창업(당시:배다리/현:주교동)을 시작으로 1928년, 능곡양조장(당시: 지도읍 토당리)1974년 현재, 고양탁주합동제조장(대표: 박관원).. 이르러 4대째 내려오고 전래된 탁주/약주 역사를 한자리에 모아 마침내 우리나라 120년 동안 내려온 전통술에 대한 박물관을 건립 하게 되었습니다.
전국적으로 몇 군데에서 이미 술 박물관을 개관 하였지만, 4대째 내려온 술도가의 명예를 걸고 남다른 사명감으로 수년간 준비하고 기획한 박물관을 개관하게 되었습니다. 이십여 년간 소장했던 술도가의 손때가 묻은 소장품과 전국적으로 흩어져 있던 술 관련 골동품과 유물들을 하나하나 구입하고 수집하였습니다.
또한 교육적인 전시의 필요성을 확인하여 조선후기 술 빚는 모습을 재현하고자 미니어쳐-인물을 조각가에 의뢰하여 별도 전시기획 하여 술을 만드는 과정을 좀 더 쉽게 이해하고자 마련했습니다. 그 외에 전통술 교육 프로그램 , 술 시음장, 야외 전시장 ,카페 ,야외 카페 및 농기기 전시장, 문화 갤러리 등 다각적인 문화/예술활동을 할 수 있는 가족단위의 복합문화 공간으로 자리 잡고자 합니다.
현대의 술 문화는 탁주(막걸리/동동주) 소비는 이미 바닥으로 떨어져 60~70대 노년층에서만 옛 추억을 그리며 가끔씩 찾는 정도로 탈바꿈한 게 현실입니다. 배다리박물관에서는 그동안의 역사와 전통을 발전시키고자 (부설)배다리술연구소를 운영하여 새로운 약주 '주교주'를 개발하여 ‘제2회 막걸리축제’에 내놓을 계획입니다.
11. 기준(奇遵) 묘
1492(성종 23)∼1521(중종 16). 조선 초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행주. 자는 자경(子敬), 호는 복재(服齋)·양덕(陽德). 아버지는 응교(應敎) 찬홍(禶弘).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이다.
1513년(중종 8)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사관(史官)을 거쳐 홍문관정자로 초계문신(抄啓文臣)이 되었으며, 박사를 역임한 뒤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스승 조광조의 노선을 견지하였으며, 사경(司經)으로 있을 때에는 임금에게 효제(孝悌)의 도리를 다할 것을 건의하였다.
1516년 저작(著作)으로 천문이습관(天文肄習官)을 겸하였으며, 검토관(檢討官)·수찬(修撰)·검상(檢詳)·장령(掌令)·시강관(侍講官) 등을 두루 역임하였고, 이성언(李誠彦)이 임금을 속이고 부정을 저질렀다 하여 이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는 한편, 당시 대각(臺閣)이 이를 묵인하였음을 논박하여 훈구파(勳舊派)인 남곤(南袞)·심정(沈貞) 등으로부터 질시의 대상이 되었다.
1519년 응교가 되어 마침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조광조를 위시하여 김식(金湜)·김정(金淨) 등과 함께 하옥되고, 이어 아산으로 정배되었다가 이듬해 죄가 가중되어 다시 온성으로 이배되었다.
어머니상을 당하여 고향에 돌아갔다가 1521년 송사련(宋祀連)의 무고로 신사무옥(辛巳誣獄)이 터져 다시 유배지에 가서 교살되었다.
시에도 능하여 《해동시선》·《대동운부군옥 大東韻府群玉》 등에 시가 수록되어 있다.
온성의 충곡서원(忠谷書院), 아산의 아산서원(牙山書院), 고양의 문봉서원(文峯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복재집》·《무인기문 戊寅紀聞》·《덕양일기 德陽日記》 등이 있다.
기묘명현(己卯名賢)의 한 사람으로 1545년(인종 1)신원되어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 아들은 한성부윤 대항(大恒)이고, 손자는 응세(應世)이며, 증손자는 광해군 때 영의정을 지낸 기자헌(奇自獻)이다. 기응세의 무덤에는 당대의 명필 한석봉과 중국의 명필 주지번이 쓴 비석이 각 1기씩 있다.
또한 고봉선생(高峯先生) 기대승(奇大升)은 그의 조카이다.
'걷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w-156 연천 DMZ 트레킹 코스 셋째길(2) (0) | 2010.09.13 |
---|---|
w-156 연천 DMZ 트레킹 코스 셋째길(1) (0) | 2010.09.13 |
w-154 북한산 둘레길(빨래골-정릉-평창동-구기동) (0) | 2010.09.05 |
w-153 2010년8월20일 산까치와 함께 남설악 흘림골 원정 트래킹 (0) | 2010.08.21 |
w-152 284회..남산걷기 산책로왕복 (0) | 2010.08.21 |
사진속에서 많은 글을 봅니다^&^
==이즘팬뱅기==
이 길에선 풀대장님의 애절한 사랑이야기가 거침없이 흘러 나오는 곳인데.....수고들 하셨습니다.
오늘도 해피데이~!!!^*^
밤톨에 제법 갈색물이 들어 보입니다~~~^^*
언제나 한결같이 밝은모습에 너무 즐거운 하루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