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기

w-5 지금 꽃길 안 걸으면 1년 기다립니다.

이즘(ism) 2008. 9. 27. 07:25

  
한강 길
ⓒ 유혜준
도보여행

분명히 한강을 따라 걸었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니 꽃길이었네요. 어찌된 일이냐고요? 한강변에 여러가지 꽃들이 많이 피어있다는 것이지요. 가을이면 어김없이 무리지어 피어나는 코스모스를 비롯해 붉은 열정을 간직한 칸나, 여러 겹 레이스가 달린 드레스 자락을 연상시키는 노란 메리골드·맨드라미·과꽃 등 꽃 종류가 다양했답니다.

 

가을이 깊어가니 활짝 피어있는 꽃들도 있었지만 이미 져버린 것들도 많았습니다. 계절의 흐름에 따라 피고 지는 꽃들을 보면서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진리(?)를 다시 깨우치게 됩니다.

 

지난 23일, 석계역에서 출발해 마포대교까지 한강을 따라 걸었습니다. 걸은 거리는 23㎞. 결코 짧은 거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리 먼 거리도 아닙니다. 시속 5㎞로 걸으면 다섯 시간 정도 걸리지요. 사람은 쉬지 않고 움직이는 기계가 아니니, 한 시간쯤 걷고 십분 정도 쉬었습니다. 중간에 물과 간식을 챙겨먹는 것은 기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허기가 져서 걷기 힘듭니다. 걷다 보면 에너지 소모가 많아서 쉽게 배가 고파지거든요.

 

하늘은 높고 말이 살찌는 계절, 사람도 입맛이 덩달아 좋아져 살이 찔 수 있습니다. 그럴 때 한강을 따라 가볍게 걸으면 기분도 좋아지고 운동도 되고 다이어트도 할 수 있답니다. 저처럼 굳이 석계역까지 가지 않으셔도 됩니다. 집에서 가까운 한강시민공원을 찾아 그 곳부터 걷기 시작하면 됩니다. 다이어트 효과를 보려면 조금 오래 걸어야 한답니다. 최소 3시간은 걸어야 운동 효과가 있습니다.

 

코스머스, 맨드라미, 메리골드, 칸나... 한강길은 꽃길

 

  
ⓒ 유혜준
도보여행

자, 한강 따라 걷는 도보여행, 출발합니다. 이번 도보여행도 '인생길 따라 도보여행(인도행)' 회원들과 함께 했습니다. 힘차게 걷다가 모여 앉아 간식을 나눠먹는 맛, 감칠 맛이 있습니다.

 

석계역에서 3번 출구로 나가 직진 방향으로 걷다가 길을 건너면 월릉교로 빠지는 곳이 나옵니다. 월릉교 아래에서 중랑천 쪽으로 방향을 잡아 걷기 시작합니다.

 

저런, 교각에 붉은 페인트로 낙서가 되어 있습니다. 글씨를 크게도 썼습니다. 스프레이를 뿌려서 쓴 것 같은데 저러고 싶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같은 낙서라고 해도 그림은 운치나 있지요. 붉은색으로 성의 없이 써갈긴 낙서는 흉물스러운 느낌만 길게 남깁니다. 우리, 이런 낙서는 하지 맙시다.

 

산책로를 따라 수크령이 무리지어 있습니다. 강아지풀을 연상시키는 털이 달린 꽃이 피는 풀인데 크기가 강아지풀보다 크고 색깔도 진합니다. 이거 청계천에 가면 아주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길 따라 쭉 이어져 있으니 보기가 좋고 가을 내음이 물씬 풍겨오는 것 같습니다.

 

이날 하늘은 잔뜩 흐렸습니다. 전날 오랜만에 시원스레 비가 쏟아진 뒤 끝이라 그런지 하늘이 비가 내릴 것처럼 잔뜩 찌푸려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걷기에는 아주 좋은 날씨입니다. 해님이 숨어버렸기 때문이지요. 이런 날에도 자외선은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는다고 하지만 보이지 않는 햇볕은 자외선에 대한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게 만들지요.

 

수크령 길을 지나니 코스모스 길이 나옵니다. 코스모스 뒤쪽으로 메리골드가 피어 있습니다. 바람이 불자 코스모스가 살랑거리면서 몸을 흔듭니다. 덩달아 꽃들도 가볍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코스모스 길은 산책로 옆에 바로 붙어 있고, 칸나 길은 자전거 도로 옆으로 바짝 붙어 있습니다. 붉은색 칸나 사이사이에 노란색 칸나가 몇 송이가 숨은 것처럼 피어 있네요. 색깔이 참 맑습니다.

 

그 다음에는 골드 코스모스 길이 이어집니다. 진노랑색 코스모스랍니다. 칸나의 노란색이 병아리색이라면 골드 코스모스는 황금색입니다. 자연이 만들어내는 색, 정말 맑고 곱네요.

 

자전거에 주렁주렁 열매 달렸네       

 

  
새박입니다.
ⓒ 유혜준
도보여행

중랑천을 따라 걷다보니 인라인 스케이트를 타려고 옷을 갖춰 입고 준비운동을 하는 어린 아이들이 보이고, 자전거를 타는 어린아이들도 보입니다. 같은 모양의 옷을 입은 것을 보니 유치원에서 단체로 온 것 같습니다. 표정들이 더 없이 밝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절로 미소를 머금게 합니다.

 

걷다 보면 이정표가 나옵니다. 이정표를 보면서 걸으면 길을 잃을 염려는 없습니다. 하지만 한강변을 걷다가 길을 잃는다고 해도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부처님 손바닥 안을 벗어나지 못한 손오공처럼 절대로 한강에서 벗어나지 않을 테니까요.

 

닭벼슬을 연상시키는 맨드라미가 엄청나게 많이 피어 있습니다. 감탄사가 저절로 나옵니다. 이렇게 많은 맨드라미를 보는 건 처음이거든요.

 

다리 아래를 지나는데 두 사람이 누워 있습니다. 자전거는 옆에 세워둔 채로. 다리 아래에서 오수를 즐기는 것, 나름대로 운치가 있나요? 물론 맨바닥이 아니라 돗자리를 깔았네요. 자전거 타다가 졸리면 돗자리 펴고 누워서 한숨 푸지게 자고 나면 기분이 상쾌해질 것 같기는 합니다.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데 자전거를 몰고 천천히 걸어오던 할아버지 한 분이 자전거 앞에 걸려 있는 나뭇잎을 가리키며 찍으라고 하십니다.

 

자세히 보니 나뭇잎에 초록색 열매 같은 것이 매달려 있습니다. '새박'이랍니다. 새알 모양의 박이라고 해서 그렇게 부른답니다. 껍질을 까면 하얀 속이 나오는데 먹어도 된다고 하시네요. 손주가 그림을 그리는데 소재로 삼으라고 따서 가져가는 중이라는 설명을 덧붙이십니다.

 

덕분에 새로운 것 하나를 알게 되었습니다.

 

한강 자전거 도로에서 낮잠을 잔다네

 

  
ⓒ 유혜준
도보여행

메리골드 꽃길을 지나고, 다시 코스모스 꽃길을 지납니다. 어, 코스모스 꽃길에서 두 사람이 작은 돗자리를 펴고 누워 있네요. 차일 비슷한 것이 처져 있어 그늘이 드리워진 곳입니다. 자전거 한 대가 얌전하게 서 있고, 두 사람은 배낭을 베개삼아 베고 한 손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자전거가 지나고 사람들이 걷는 길인데 아랑곳하지 않네요. 쏟아지는 잠을 도저히 떨쳐 낼 수가 없었나 봅니다. 졸리면 자야지, 졸면서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는 사고가 날 수도 있겠지요?

 

코스모스 길을 지나니 다시 칸나 길이 이어집니다. 한쪽은 칸나 길, 다른 한쪽은 수크령 길입니다. 걷는 길이 부드러운 흙길이면 금상첨화일 텐데 그게 조금 아쉽네요.

 

살곶이 공원 가는 길과 청계천 가는 길이 갈리는 곳까지 왔습니다. 살곶이 공원 쪽으로 방향을 잡습니다.

 

한강을 따라 꽃들이 많이 피어 있긴 하지만 꽃이 없고 도로만 이어진 곳도 있습니다. 물론 자동차 도로는 아니고 자전거를 타고 속력을 내기 좋게 만들어진 길입니다. 자전거 전용도로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보행자를 위한 산책로가 따로 없기 때문에 그 길을 걷습니다.

 

그런 길을 걷다보면 '자전거를 타야 제 격이겠다' 싶은 생각이 들곤 합니다. 당연히 자전거를 타고 쌩쌩 지나가는 사람들, 많습니다. 그들의 길을 막지 않게 조심해야 걸어야겠지요? 아니면 사고가 날 수 있습니다.

 

여러 종류의 운동기구가 놓인 쉼터의 긴 나무의자에 앉아 걷느라 피곤해진 다리를 쉬게 합니다. 운동화를 벗고 양말을 벗습니다. 후끈 달아오른 발에 시원한 강바람이 닿는 느낌이 참 좋습니다. 양말은 땀으로 젖었습니다. 긴 거리를 걸을 때는 이렇게 맨발에 바람을 쐐주는 게 좋지요. 발의 피로가 조금은 덜어지거든요.

 

아주머니 한 분이 비둘기 모이를 나눠주고 있습니다. 비둘기들이 잔뜩 모여 바닥의 모이를 먹느라 분주합니다. 비둘기들을 보니 조류독감 생각이 납니다. 한 동안 조류독감 때문에 비둘기들이 기피대상이었지요.

 

  
ⓒ 유혜준
도보여행

한강을 건너는 체험을 할 수 있다는 거북선 나루터를 지납니다. 동작대교 아래를 지나고, 한강대교 아래도 지납니다. 한강철교도 금방 나옵니다. 한 20㎞ 쯤 걸으니 슬슬 걷기가 지겨워집니다. 원효대교 아래를 지나고, 곧바로 마포대교가 나옵니다.

 

이날의 도보여행은 마포대교까지입니다. 23㎞를 걸었습니다. 종아리가 조금 뻐근해졌지만 그래도 이 날은 아주 빠르게 걷지 않았습니다. 적당한 속도로 힘들이지 않고 걸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발바닥이 안 걸은 것처럼 말짱한 것은 아닙니다. 왼발 엄지발가락 아래쪽의 발바닥이 물집이 잡힐 것처럼 불편해졌으니까요. 그래도 걷고 나니 뿌듯합니다. 기분도 덩달아 상쾌해지고요.

 

길게 이어진 한강을 따라 이어진 자전거 도로와 산책로는 걸을 때마다 다른 느낌을 안겨줍니다. 계절마다 피는 꽃도 다르고 날씨도 달라 그런 것 같습니다. 그래서 걸을 때마다 늘 새롭지요.

 

이 가을, 한강을 따라 한 번쯤 걸어보세요. 색다른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2008.09.26 15:43 ⓒ 2008 Ohmy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