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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83 '눈'이 된 경복궁역

이즘(ism) 2008. 4. 18. 15:37
시각장애아들의 ‘눈’이 된 경복궁역
인근 맹학교 찾아 불편조사…직원들 학생등교길 동행
화장실엔 안내장치…점자 블록도 이용 편리하게 옮겨
한겨레 석진환 기자 박종식 기자
16일 아침 8시 정각, 서울 지하철 3호선 독립문역에서 출발한 열차가 미끄러지듯 경복궁역에 도착했다. 하행선 4-1번 승강장 앞에선 정복을 갖춰 입은 경복궁역 이상걸 부역장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출근길 직장인들의 잰걸음 사이로 상진(가명)이가 내려 이씨와 반갑게 인사했다. 상진이는 경복궁역에서 1.6㎞ 떨어진 서울맹학교에 다닌다. 부역장은 상진이를 안내하며 에스컬레이터와 계단을 거쳐 2번 출구를 빠져나왔고, 도로 중앙의 점자블록 위를 사뿐히 걸어 8시20분께 학교에 도착했다. 상진이의 등굣길을 안내하는 일은 일주일에 네 번, 경복궁역 직원들이 시간을 쪼개 돌아가며 한다. 경복궁역 역장 이재호씨는 “학교까지 가는 길에 장애물 등 주의할 곳을 알려주며 나중엔 혼자서도 다닐 수 있는 힘을 길러주기 위한 것”이라고 소개했다.

아이를 학교에 안내하는 일이 아니더라도, 최근 2년 사이 경복궁역은 서울맹학교 학생들이 이용하기에 불편함이 적은 역으로 탈바꿈했다. 이런 변화는 2006년 2월, 이씨가 역장으로 오면서부터 시작됐다. 이씨는 역장으로서 업무파악을 하던 중 경복궁역을 이용하는 인근 서울맹학교 학생들이 많다는 점에 주목했다. 학교를 찾아가 ‘우리 역이 어떻게 바뀌면 좋겠느냐’며 의견을 구했다. 학교에서는 ‘출입구 안내표시판에 맹학교 방향을 넣어 달라’는 부탁과 함께 학생들이 이용하는 2번 출구 앞의 가판대가 통행에 불편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출입구 안내는 역에서 해결했지만, 서울시에서 허가 하는 가판대는 권한 밖의 일이었다. 종로구청을 찾아가 이런 문제를 설명했지만, “가판대 역시 생활이 어려운 사람을 대상으로 허가한 것이라 쉽지 않다”는 대답을 들었다. 하지만 역장은 포기하지 않고 설득했고, 결국 1년2개월 만인 지난해 7월 가판대를 없앴다. 가판대가 없어지면서 보행도로 한쪽에 치우쳐 있던 점자블록도 길 가운데로 옮겨 설치했다.

경복궁역의 노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다시 학교 쪽에 불편한 사항을 추가로 물었고, 이번엔 역사 안 조명이 어둡고, 학생들의 화장실 이용이 불편하다는 점과, 안전을 위한 스크린도어 설치 등이 건의사항으로 전달됐다.

맹학교 학생들 중엔 아주 희미하게만 볼 수 있는 아이들이 있는데, 경복궁 역사는 빛을 흡수하는 화강석으로 되어 있어 역사가 전체적으로 어둡다는 문제를 안고 있었다. 조명을 밝은 것으로 바꿔 달고, 가동할 수 있는 모든 조명을 100% 유지하는 것으로 방침을 바꿨다.

화장실 문제는 ‘음악’으로 해결했다. 화장실 앞에 유도 안내 음악시스템을 설치해, 아이들이 음악을 듣고 화장실을 찾아갈 수 있도록 했다. 학교 쪽에는 “아이들한테 음악이 나오는 곳에서 오른쪽으로 열다섯 걸음을 가면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다고 안내해 달라”고 부탁했다. 음악시스템 설치에 들어가는 예산은 당장 확보하기가 쉽지 않아 ‘화장실문화연대’에 부탁해 이를 해결했다. 스크린 도어 설치 역시 본사인 ‘서울메트로’ 담당 부서에 부탁했고, 올해 안으로 공사를 시작하겠다는 확답을 받았다. 서울맹학교 이숙자 교감은 “우리가 부탁하는 게 아니라, 경복궁역에서 먼저 찾아와 불편한 게 없는지 물어와서 사실 처음엔 좀 놀라기도 했다”며 “세심하게 신경 쓰는 경복궁역의 사례가 다른 지하철역에도 귀감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석진환 기자 soulfa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