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불구불 이어지는 성벽을 돌아… ‘병자호란 47일의 역사’를 만난다 |
남한산성 성곽 일주 |
김종락기자 jrkim@munhwa.com |
살받이 터 총안 앞에서 젖은 군병들이 얼어 있었다. 바람에 무너진 가리개들이 흩어졌고 물 먹은 거적이 나뒹굴었다. 손에 창이나 활을 쥔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군병들은 두 손을 제 사타구니 사이에 넣고 비비며 언발을 굴렀다. 젖은 발을 구를 때마다 빗물이 튀었다. 소나무 위로 기어 올라간 자들은 얼어 죽었는지 두 다리가 늘어져 있었다. -김훈‘남한산성’(학고재)에서 1. 지난해 마지막 날, 남한산성을 성벽 따라 걸었다. 집을 나설 때 본래 목적지는 남도의 산이었다. 오랫동안 생각만 하고 가지 못했던 광주 무등산이나 전주 모악산에 가고 싶었다. 이미 전날부터 폭설이 내려 무등산, 지리산 등은 이미 입산이 금지됐다는 소문이 들렸지만 갈 수만 있다면 눈 내려 인적없는 산이야말로 얼마나 큰 축복인가. 눈길 등산에 대비해 장비를 든든하게 챙겼다. 뉴스로만 듣던 눈은 경부고속도로 망향 휴게소에서 현실로 나타났다. 천안 분기점을 지나 천안∼논산간 고속도로로 올라타자 눈발은 주먹만한 눈송이로 바뀌었다. 바퀴 자국조차 희미한 고속도로를 시속 30㎞로 기어가던 자동차가 옆으로 찔끔 찔끔 미끄러지기도 여러 차례, 이미 도로변에 주저앉은 차는 부지기수였고 방향을 옆으로 바꿔 도로를 가로막은 차도 여러 대였다. 핸들을 움켜쥐고 조심조심 고속도로를 가는데, 어느 순간 자동차가 휙 돌았다. 위험했다. 서둘러 4륜 구동으로 바꾸고 자동차를 수습했으나 이렇게 전주나 광주까지 가는 것은 무리였다. 고속도로야 어렵잖게 간다 하더라도 퍼붓는 눈을 뚫고 무등산이나 모악산을 오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서논산 IC에서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다시 서울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남한산성은 눈에 막혀 자동차를 돌린 뒤 서울로 향하며 생각한 산이다. 병자년(1636년) 12월14일, 강화로 가려다 청나라 군병에 길이 막힌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갔듯이 폭설로 남도의 산으로 가는 길이 막혔다면 남한산성으로 가야 할 것 같았다. 때 마침 이번 겨울들어 가장 추운 날씨였다. 2. 임금은 남한산성에 있다…. 병자년(1636년) 12월14일 인조가 청병(靑兵)을 피해 남한산성에 들어간 뒤 47일간 인조실록에 자주 등장하는 문장이다. 이제 임금 없는 남한산성, 하지만 인조 임금은, 최명길은, 김상헌은, 이시백은, 병자년 그 혹독한 겨울을 겪어야 했던 1만2000여 군병들의 기억은 최근까지 남한산성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청나라 군대가 에워싼 산성에서 임금을 사이에 둔 주화·척사파들이 싸운 역사로 인해 1980년대 어느 봄날, 대학 1학년이던 나는 문무대에 소집돼 총을 멘 채 군가를 부르며 남한산성에 올라야 했다. 남한산성에 있던 인조가 47일만에 산을 내려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린 부끄러운 역사는 군부 정권 시절 교련 시간뿐 아니라 군 생활하며 받았던 정훈 교육의 단골 메뉴이기도 했다. 그리고 문민정부 이후 잠시 남한산성을 떠났는가 싶었던 이들의 기억은 지난해 베스트 셀러 소설가 김훈에 의해 다시 세상으로 불려 나왔다. 중부고속도로 광주 IC에서 빠져 나온 뒤 43번 국도를 거슬러 오르다 좌회전해 길을 따라가면 남한산성을 만난다. 길 위에 문루가 높게 버티고 선 성문이 바로 동문이다. 동문과 수문 사이에 있는 다리를 지나자 마자 나오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등산화 끈을 조였다. 추운 날씨, 계곡을 타고 올라온 차가운 바람이 좁아진 골짜기에서 속도가 빨라졌다. 잠시 채비를 갖추는데도 뺨이 얼얼하고 손이 시렸다. 주차장을 벗어나 남쪽 오르막을 시작하자 마자 시구문. 문 밖을 나서니,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 때 처형당한 300여명의 시체가 버려진 곳이라는 표지석이 나온다. 남한산성은 행궁과 수어청, 연무관 등이 들어선 군사 시설인 것만은 아니었다. 정2품 관원인 유수가 상주하던 광주부의 중심지로, 개성이나 수원 같은 지역 행정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이 곳에서 천주교인들의 대규모 처형이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성곽 옆으로 널찍한 등산로를 따라 계속 올랐다. 빠르게 시야가 넓어지면서 중부고속도로와 광주시 일원이 눈에 들어온다. 본성에 대한 직접 공격을 완화하기 위해 성곽 바깥에 쌓은 옹성도 성곽 일주가 아니면 보지 못할 것들. 성곽 보수공사가 진행 중인 남장대 터와 제3 남옹성을 지난 뒤 나타난 암문에서는 성곽 바깥으로 나온 뒤 성곽 밑으로 난 길을 걸었다. 오른쪽 위로는 성곽, 왼쪽은 숲이 있는 넓은 길이었다. 남문에서 멀지 않아 가볍게 차려입은 가족, 또는 연인들이 많이 눈에 띈다. 길은 제2남옹성을 지나 제1남옹성 암문에서 다시 성곽 안쪽으로 이어진다. 제1남옹성 암문에서 성 안으로 들어가 성곽을 따라 조금 걷다 보면 남문 문루가 나온다. 성남 쪽에서 올라온 이들이 지나는 문으로, 남한산성의 대문격이다. 몇년 전까지 성문으로 차가 드나들었으나 이젠 산성 밑으로 자동차가 드나드는 터널이 따로 뚫렸다. 3. 남한산성 성곽 일주는 남문에서 수어장대로 오르는 길에서 본격화한다. 제법 긴 오르막으로 숨이 차지만 사람들로 가장 붐비는 길이다. 1980년대부터 계속된 성곽 보수 공사로 성곽은 물론이고 자갈 투성이이던 등산로도 나무 계단 등으로 말끔하게 단장됐다. 나무 계단 오르는 것이 자연 그대로의 길 걷는 것보다야 못하지만, 남한산성이 주요 사적인 것을 생각하면 이해 못할 것도 아니다. 오르막은 영춘정을 지나 수어장대까지 계속된다. 수어장대가 있는 곳은 산성 최고봉인 청량산의 정상부. 이곳 성벽에 서면 멀리 아차산까지 서울 동남쪽 일원과 성남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산 아래 거여, 마천에서 산록을 기어 올라온 찬바람은 끊임없이 성벽을 타 넘고. 지금부터 372년 전에도 저 차가운 겨울 바람은 끝없이 성벽을 넘으며 성첩의 총안을 지키고 선 군병들의 몸과 마음을 얼렸으리라. 수어장대에서 서문까지는 편한 내리막길, 서문 밖은 경사가 심해 우마차가 다닐 수 있는 길은 아니지만 송파로 내려가는 가장 빠른 길이다. 인조가 청태종에게 항복하러 갈 때도 이 문을 통해 나갔다. 서문을 지나 연주봉 옹성, 북장대 터, 북문에 이르기까지는 여전히 사람이 많다. 인구가 많은 송파, 강동에서 산성을 오르는 이들이 많이 걷는 길인데다 산성의 중심인 종로에서 멀지않은 탓이다. 삼전도에 위치한 적을 가장 가깝게 보면서도 성곽이 응달진 곳에 위치해 병자호란 당시 군병들이 극심했던 추위에 가장 많이 떨었음직한 곳도 바로 이 일대다. 북문을 지나자 붐비던 사람들이 확 줄었다. 동장대 터에 이르기까지 등산객 한명 마주치지 않을 정도였다. 적막한 길, 급하게 오르막을 올라야 할 일이 없으니 역사 탐방로는 사색로로 바뀌었다. 북문 밖, 저 아래 골짜기가 병자호란 당시 성밖을 나섰던 300여 정예가 청나라 군의 매복에 걸려 궤멸됐던 곳. 군병들의 생명보다 자신의 공이 더 중요했던 영의정 김류의 앞뒤 없는 욕심에 밀려 성 밖으로 나섰던 군병들은 청나라 군의 그 뻔한 매복에 걸려 차가눈 눈 위에서 숨져가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구불구불 이어진 성벽의 총안을 들여다 보며 옛 역사를 생각하기도 하고, 하남 일대와 검단산 쪽의 수려한 풍광도 감상하며 천천히 걸었다. 산길이기도 하고, 산길이 아니기도 한 길, 생각에 잠겨 천천히 걷다보면 동장대터~신지옹성~장경사를 거쳐 동문에 이르는 먼 길도 금방이다. 호란이 끝난 지 이미 370여년, 남한산성엔 임금도, 주화파도, 척사파도 없지만 1만2000여 군병들이 추위와 굶주림과 공포에 떨던 역사는 남한산성 성벽에 여전히 살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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