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지난 8일, 공릉 역에서 잣나무 숲길을 잠시 걷고, 서울산업대 캠퍼스를 지나 불암산 숲길을 걸었습니다. 걸은 거리는 얼추 13km쯤 됩니다. 숲이 우거진 불암산은 땡볕을 피하기에는 제격이었습니다. 숲에서 부는 바람이 에어컨 바람보다 더 좋다는 건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 겁니다.
답답한 집에서 더위 때문에 짜증이 나시는 분들, 집 근처의 가까운 산을 찾아 한낮을 보내시는 것도 아주 좋은 피서가 되겠지요. 산길을 걷지 않더라도 시원한 나무그늘 아래에 앉아 있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기분전환이 될 테니까요.
이번 도보여행도 '인생길 따라 도보여행(인도행)' 회원들과 함께 했습니다. 더위도 여럿이 나누니 한결 덜하더군요.
이번 도보여행의 출발지는 공릉역입니다. 공릉역에서 10여 분 정도 걸어가면 그리 넓지 않은 잣나무 숲이 나옵니다. 길이는 100여m 남짓 되나? 빽빽하게 심겨진 잣나무들이 보기 좋아 일부러 들렀답니다. 잣나무 숲 끝까지 걸어갔다가 다시 걸어 나오는 재미도 꽤 괜찮았습니다.
공릉역 잣나무 숲길을 걷다
잣나무 숲에서 나와 서울산업대를 향해 걷습니다. 학교 정문으로 들어가 후문으로 나옵니다. 학교를 가로질러 간 셈이지요. 학교건물 구경하면서 걷는 재미도 좋습니다. 일부러 가게 되지는 않으니 이럴 때 걸어봐야지요.
아, 햇볕이 뜨겁습니다. 반소매 웃옷을 입고 도보여행을 다녔더니 팔만 까맣게 탑니다. 해서 요즘 한창 유행인 긴팔 토시를 했는데 이거 느낌이 좋습니다. 답답하지 않고 시원하면서도 착용감이 거의 없네요. 이런 맛에 사람들이 하고 다니는구나, 합니다.
한 시간쯤 걷자 한국전력 정문이 보입니다. 그 앞을 지나 조금 가니 '불암산 도시공원 전망명소' 가는 길을 알려주는 이정표가 보입니다. 그 길을 따라가니 불암산 등산로 안내판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효성아파트 앞에서 태릉사격장을 지나 불암산 정상 부근까지 갔다가 삼육대학교 쪽으로 내려 갈 예정입니다. 등산로를 보면서 길을 확인합니다. 불암산에 처음 가시는 분들은 그것을 참고 하시면 됩니다.
군부대를 왼쪽으로 끼고 산길을 걸어 올라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걸어간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흙길이 산 속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지루한 아스팔트길을 걸어본 사람만이 흙길이 얼마나 부드러운지 압니다. 숲으로 이어진 길을 발보다 눈이 먼저 갑니다. 길을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집니다.
뜨거운 햇볕이 쏟아지지만 무성한 나무들이 간간이 그늘을 만들어주고 바람을 보내줍니다. 그래서 더위가 덜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숲길을 십여 분정도 걸어 들어가니 표지판이 하나 나옵니다. 맨발길이라네요. 맨발로 걸어보랍니다. 걷기 좋은 길이 끝이 보이지 않게 이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신발을 안 벗는군요. 혼자만 신발을 벗을 수는 없는 노릇. 그래서 그냥 올라갑니다. 아쉬워 표지판을 한번 돌아봅니다.
불암산에는 맨발길이 있다네
어, 맨발이다! 산에서 맨발로 내려오는 사람이 보입니다. 신발을 배낭 위에 얹고 경쾌하게 맨발로 흙길을 걷네요. 그 분의 발, 무척이나 자유로워 보입니다. 다음에는 이 길을 꼭 맨발로 걸어야지, 다짐을 하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 알 수 없습니다. 말이 쉬워서 다음이지, 다음을 기약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 살아온 경험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잘 자란 나무 사이로 난 길을 걷습니다. 땀이 흐릅니다. 그 땀을 숲에서 부는 바람이 식혀 줍니다. 하지만 더위 때문인지 걷는 걸음이 자꾸 느려집니다. 이런 날은 쉬엄쉬엄 천천히 걷는 게 좋습니다. 무리할 필요가 없지요. 느긋한 마음으로 걸어야 건강에도 이롭지요.
숲길 한쪽에 노란색 현수막이 걸려 있습니다. 무슨 내용인가 했더니 태릉국제종합사격장에서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선수들이 연습에 열중하고 있답니다. 사격장에서 총을 쏘고 있으니 안전을 위해서 정해진 등산로를 이용하라는 안내문입니다.
불암산에서 총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바로 사격장 때문이지요. 총소리를 들으니 절대로 등산로를 벗어나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소나무가 무리지어 서 있습니다. 산에서 소나무를 만나면 이상하게 반갑습니다. 보면 볼수록 마음을 사로잡는 나무가 바로 소나무입니다. 그래서 보고 또 보고 향기도 맡습니다.
'숲과 기암이 어우러진 불암산'에도 전설이 깃들어 있다고 합니다. 어떤 전설인지 궁금하지요? 불암산의 전설을 알려주는 표지판을 찬찬히 살펴봅니다.
저런, 불암산은 원래 금강산에 있던 산이었답니다. 어쩌다가 금강산에서 서울까지 먼 걸음을 했을까요? 소문이 문제였습니다. 조선왕조가 들어서서 도읍을 정하는데 한양에 남산이 없어서 못 정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은 불암산은 자기가 한양의 남산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불암산이 금강산을 떠나 한양에 온 이유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이나 산이나 서울(한양)에 올라오고 싶어 하는 건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이렇게 해서 불암산은 금강산을 떠나 한양으로 왔더랍니다. 그런데 이런, 한양에는 이미 남산이 떡 하니 자리를 잡고 있었다지요. 역시, 소문은 믿을 게 못되는군요. 허탕을 쳤으니 다시 금강산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러기가 싫었다지요. 저 같아도 그랬을 거 같기는 합니다. 큰소리 탕탕 치고 떠나온 고향에 빈손으로 돌아가기 싫겠지요.
해서 불암산은 그냥 한양 언저리에 주저앉아 버렸답니다. 헛소문을 퍼뜨린 한양이 곱지 않아 돌아앉은 형국으로 말입니다. 누가 만들어낸 전설인지 모르지만 그럴 듯 하지요?
불암산 정상까지 2.5km를 남겨두고 쉬다가 내려가기로 합니다. 등산이 최종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시원한 얼음물을 마시고, 준비해 온 간식을 나누어 먹습니다. 나무들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줍니다. 도심은 불볕더위로 이글이글 끓어오르고 있을 텐데 산 속은 고요하기만 합니다.
쉴 만큼 쉬었으니 이제 내려가야겠지요. 내려가는 길 역시 걷기 좋은 흙길입니다. 불암산에는 정말 걷기 좋은 길이 많습니다. 가까이에서 새 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귀를 기울이니 뻐꾸기 울음소리네요.
길을 따라 한참을 내려오니 작은 호수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 작은 호수의 이름은 '제명호'. 삼육대학교의 부지를 마련하고, 삼육신학원 원장을 역임한 '이제명(James. M. Lee)'씨의 이름을 따서 만든 호수랍니다. 인공호지요.
그러고 보니 어느새 삼육대학교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불암산에서 삼육대학으로 내려가는 길로 접어든 것이지요. 학교 안이라 그런지 조경이 깔끔하게 되어 있습니다. 물레방아도 있습니다.
삼육대 안에는 걷기 좋은 길이 있어
내려오다 보니 '환경보호의 파수꾼 삼육대학'에서 게시판 하나를 세워놨습니다. 쓰레기의 수명을 알려주는 내용입니다. 알루미늄 깡통의 수명은 자그마치 500년, 유리병은 1000년입니다. 한데 플라스틱 용기와 스티로폼의 수명은 '무한'이라네요. 절대로 썩지 않는다는 건데, 갑자기 섬뜩해집니다. 쓰레기가 썩어야 생태계가 순환되는 것인데 썩지 않는다면 생태계의 순환 고리가 깨진다는 얘기가 되겠지요.
하긴 우스갯소리로 요즘 사람들은 죽어도 썩지 않는다고 하지요. 왜? 방부제를 너무 많이 먹어서 이미 방부처리가 되었다나요. 농담이지만 '언중유골'이라고 기분이 나빠집니다. 맞는 말일 거 같아서….
삼육대학에서 나와 강릉을 지나고 서울여자대학교 앞을 지나갑니다. 강릉은 조선의 13대 임금 명종과 왕비 인순왕후가 잠들어 있는 곳입니다. 육군사관학교 앞도 지납니다.
산에서 벗어나 도심으로 나오니 땡볕입니다. 햇볕이 무섭게 내리쬐는 길을 걸어 태릉선수촌을 지나고, 태릉 앞도 지납니다. 태릉에는 조선의 11대 임금인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가 홀로 잠들어 있습니다.
태릉을 끝으로 이날의 도보여행은 끝났습니다. 하지만 그게 진짜 끝은 아니었지요. 태릉에서 아주 유명하다는 콩국수집에서 시원한 콩국수를 먹는 것으로 진짜 도보여행은 마무리되었으니까요. 진한 국물이 일품이었습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불암산에 가시려면 물은 꼭 준비해야 합니다. 더운 여름에 마실 물이 없어서 낭패를 보면 안되겠지요? |